끝없이 너울대는 밤바다 그리고 총총히 별 박힌 밤하늘을, 당신은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바라본 기억이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이 광경을 비야 셀민스(Vija Celmins)의 작품으로 경험했다. 그의 작품이 고요한 울림으로 채워져 시간이 갈수록 기억 속 어딘가에서 확장되어간다. 셀민스가 키우는 강아지가 되어 로스앤젤레스 작업실 근처의 밤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죽음의 순간이 의식 속에서 나울 거리기도 한다.
좋은 작품은 ‘좋은’라는 형용사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작품을 통해 작가를 상상하게 하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경험을 하게 한다.
비야 셀민스는 북유렵의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에서 1938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세계 2차 대전을 겪은 셀민스는 1944년 가을, 소련이 재침공한 7개월간의 폭격을 견디고 독일을 가로질러 여러 난민 캠프들을 전전해야 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셀민스와 가족들은 라트비아 난민 캠프에서 2년을 보낸 다음 194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들은 온통 톤 다운된 회색빛으로 변주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K99EVGM-EG0
1963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로스앤젤레스(UCLA) 대학원에 진학한 셀민스는 13년 동안 샤워실도 부엌도 없는 협소한 스튜디오에서 생활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사이즈의 작품을 그려나간다. 그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유추해보면, 아마도 그리는 시간보다 무언가를 응시하는 시간이 더 길었으리라. 그리고 그에게 본다는 건, 생각하는 일일 테다. 그곳에서 셀민스는 스튜디오 메이트나 다름없는 책상 램프와 선풍기, 히터, 먹다 남은 음식을 오랜 시간 보고(생각하고), 정확히 평면 위에 옮겨 담는 작업을 진행한다. (그의 에세이에는, "looking at simple objects and painting them straight.”라고 쓰여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무렵에는 어린 시절에 겪은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을 잡지나 책에서 찾은 미군의 폭격기나 핵실험의 이미지를 가져와 그려나가기도 한다. 셀민스의 당시 인터뷰를 살펴보면,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습관 등을 버리고 예술의 본질적인 것(작가는, authentic이란 단어를 사용했다.)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그 당시의 미술사조가 팝아트와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등이 전개되던 시기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셀민스의 작업은 고되고, 외롭다.
셀민스는 이후 10여 년간 달 표면이나 행성 등 여러 과학적 이미지에 관심을 갖으며 페인팅을 잠시 쉬고 흑연과 목탄에 몰두하게 된다. 이 시기 동안 그는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는 과정을 겪으며 작업실에서 가까운 바다로 강아지와 함께 매일 밤 산책을 나가 밤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이 시절에 그려진 바다 물결 작업과 밤하늘 시리즈는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비야 셀민스는 어떤 마음으로 수없이 많은 바다의 물결과 밤하늘을 반복해 그려나간 것일까. 아니,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반복되는 수행적 작업은 지워지기 위한 기억으로 남겨진 걸까. 어딜 봐도 끝없이 펼쳐진 바다 표면의 물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평선이 없는 모호하고 무한한 느낌의 공간이 펼쳐지지만 그들은 각기 다른 명도와 질감을 가지고 있다. 셀민스는 이것을 재묘사(re-describing)라 부르며, 일종의 물리적 대상이 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그려나가는 일을 지속했다.
셀민스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는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이다. 개인적으로 포토리얼리즘이나 극사실주의 회화를 선호하지 않기에 셀민스의 작업은 더없이 귀하고 소중하다. 그의 작업이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오는 건, 매체와 평면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작가의 성실한 태도뿐 아니라 자신의 감상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려 애쓰지 않은 채 한 발 물러나 예술 자체로서의 미학을 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요즘같이 화려한 작업들이 넘쳐나는 동시대 미술 속에서, 셀민스의 고요하고 세심한 평면 작업은 더욱 빛난다. 작업실에 놓인 작은 사물에서부터 로스앤젤레스의 광경과 더 넓은 세계(역사, 자연, 우주)로 뻗어나가는 비야 셀민스의 작업을 응원한다. 그리고 그가 이 행성을 떠나기 전까지 보여줄 친밀하고도 신비로운 명상적 세계를 앞으로도 기대한다.
"I was going to start in a more humble place with just my eyes and my hand."
-Quoted in the wall text of Vija Celmin's Met Breuer exhib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