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이상한 시절이 있지 않을까. 당시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니 꿈같이 기이했던 시절.
꽝꽝 언 반려견의 몸을 끌어안았었다. 흰 털과 길다란 속눈썹이 너무나 그대로여서 내가 가지고 있는 체온으로 꼭 안아주면 다시 살아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음 후에 아니, 죽음으로 향해가는 표피에는 고유의 친밀한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사람과 동물의 피부에도, 식물의 이파리와 꽃잎에도.
내 어깨 뒤편으로 바랜 타투인 듯 푸른 혈관이 비쳐 보인다.
처음으로 많이 좋아했던 사람은 민소매를 입고 있어 드러난 내 어깨를 가만히 바라보다, "피부가 얇아서 혈관이 비쳐 보이는 거야"라고 말해줬다. 어깨뼈를 감싸고 있는 피부에 드러난 실핏줄의 푸른 혈관을 그날 밤 처음으로 거울 앞에 등을 돌려 보았다. 내 몸을 타인의 눈으로 알게 되었다.
벨기에 출신의 베를린드 드 브뤼케르(Berlinde De Bruyckere, 1964~ )는 직물이나 동물의 가죽, 금속, 나무 등을 재료로 살아있는 존재의 거죽을 날 것 그대로 섬세하게 보여준다. 인체나 말 등을 1:1 사이즈로 캐스팅한 후 어딘가에 위태롭게 하지만 안위가 되는 무언가에 기대어, 뉘어져, 걸어 놓는다. 그들은 머리가 없으며 성을 알 수 없는 형태다. 그렇기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겉껍질에서 삶의 유한성과 죽음을, 살아 숨 쉬는 것들의 연약함과 고통받는 몸을, 자연(세월)의 압도적인 힘을 생각하게 한다.
젊은 예술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이 왜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힘들어한다. 예술에 정답이 있겠냐마는, 개인적으로 예술가들이 자신의 가장 취약하고 아픈 부분을 진실하게 마주하는 시간을 갖기를 격려한다. 오랫동안 고민한 진실의 시간 속에서 그 예술가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창작품이 나오게 되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드 브뤼케르 또한 처음부터 이런 작업을 선보여왔던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 때는 돌과 나무, 강철, 콘크리트를 사용해 미니멀한 조각 작업을 만들다가, 1990년대부터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용기 내어 꺼내기 시작한다. 엄격한 가톨릭 기관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부친이 도살업자였던 드 브뤼케르는 삶과 죽음, 육체적 고통, 상처 받은 피부를 작업에 가져와 설치 작업으로 진행한다. 소말리아의 기근, 코소보 전쟁, 르완다 집단학살 등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들에서 몸은 뒤틀려져있거나 늘어져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고통스럽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작가의 위로와 연민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인간 조건의 근본적인 탐구를 시작하게 된 작업, <Spreken>(1999)에서 그는 '담요'를 피부와 마찬가지로 작업에 쓰고 있다. 투명한 왁스와 안료를 섞어 캐스팅해 벌거벗겨진 인체 위에는 담요가 덮여있다. 담요 아래로 보이는 창백한 다리에서 불안함과 기이함을, 하지만 그 위에 씌어진 담요로 위로와 안식처를 동시에 느낀다.
드 브뤼케르의 작업을 바라보는 일은 고통스럽고 아픈 감정을 대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는 "침묵의 일꾼"(시간과 자연)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 극도의 아름다움에 숨이 막힌다. 이윽고, 얼굴이 없고 성별을 알 수 없는 유약한 존재가 다가와 속삭인다.
'shallwedance your clumsy dance made me feel like i was on the waves.'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는 마법의 문 때문에 예술을 벗어나지 못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eT6NQ01Ey5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