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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신 Oct 22. 2023

내 기억은 믿지 못해도 기록은 믿는다.


 내 정신상태가 건강하지 못할 때 보내는 신호가 있다. 신체적 증상으로는 입맛이 없거나 과하게 당이 많은 간식 찾기. 기운이 없고 무기력하다. 집중력이 떨어짐(대화할 때 상대방 말에 집중하기 어려움). 잠을 자고 일어나도 피곤하다.     


 심리적 증상으로 자신감 하락, 끝없는 자기 비하, 나의 부족한 점만 집요하게 찾아내기, 내가 상처받을 말만 골라서 내 마음 두들겨 패기, 타인의 말 왜곡해서 듣기, 타인의 말과 행동에 지나친 의미 부여, 모든 게 무의미하고 귀찮음, 지난날의 선택이 잘못되었고 앞으로도 잘못될 거라는 잘못된 믿음.      


  나는 요즘 이 모든 증상을 겪고 있다.      

 

 올 상반기, 불안과 우울함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매일 일기를 썼다. 노트에 나를 미워하는 마음, 수치심, 권태, 열등감을 토해냈다. 일기를 쓰면서 시간이 지나서도 이 일기들은 다시 들춰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겨울, 봄, 여름, 가을이 되었다. 나는 계절이 변하는 동안 비슷한 이야기를 적고 또 적었다.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일기에서 반복되는 단어나 주제를 포착해 해결 방법을 고민하고 행동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지겨울 때까지 고민을 반복해서 적었다. 나는 늘 끈기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 나는 끈기 있다 못해 집요한 사람이다.     


  계속 고민하던 대학원 생활을 결정 내렸다. 그만두자고. 결론을 내리고 나서도 내가 감정적인 판단은 아닌지, 충동적인 판단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이 판단이 순간적인 것도 감정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한 달 전, 일 년 전, 이 년 전의 일기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2년 전 봄.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자퇴를 고민했고, 그해 여름과 겨울에도 이듬해에도. 똑같은 나의 결점과 똑같은 문제들로 고민했다. 시간이 흘러 해결이 되는 일도 있지만 시간이 흘러도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문제도 있었다. 늘 모호하기만 대학원 생활을 보고 더 이상 고민 없이 마음을 내릴 수 있었다.      


 정신 건강이 나쁠 땐 지난 시간이 모두 나빴고 잘못된 것만 같다. 내 안에 검열관은 이런 내 생각을 먹고 자라난다. 몸집이 커진 검열관은 내 선택, 노력, 고민, 능력, 성격, 체력 등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처음엔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끊임없이 비판받고 나면 순응하게 된다. ‘그래, 내가 다 잘못했고 인정한다.’ 저항할 힘도 더 이상 나를 비판할 힘도 잃을 때쯤 지난날의 기록을 펼쳐보게 된다.     


 일기장을 쭉 읽다 보면 좋았던 날, 고마웠던 날, 오늘은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내일은 잘해보겠다고 다짐 하는 날, 후회 범벅인 날, 화가 나는 일이 있었지만 해학적으로 기록 한 날,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되지 않는 날, 그럼에도 다시 잘해보고 싶은 날. 나는 한 번도 내 삶이 아무렇게나 되기를 바랐던 적이 없었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마음과 현실이 비례하지 않다 보니 실망하고 좌절했을 뿐이다.      

 

 지금 내 상태가 좋지 않아 올바른 판단이 안 되는 상태라는 걸 깨닫게 된다. 현재 내 상태는 말 그대로 상태일 뿐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반복되는 일상을 기록한 덕분에 나는 당분간은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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