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신 Nov 26. 2023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똥인지 된장이 찍어 먹어봐야 하는 나에게 보내는 편지


 올해가 딱 100일 남던 날 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보다 마무리 잘하고 싶었어. 휴대폰 디데이 앱에 ’2023년 마무리 잘하기!‘로 설정했어. 



 그사이 대학원을 그만두기로 했어. 갑작스러운 결정은 아니었잖아. 대학원 입학할 때부터 나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어. 처음엔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라 어색한 게 아닐까, 입다 보면 내 몸에 맞게 늘어날 거라 믿었어. 그 옷 말고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몰랐거든. 


 대학원은 옷의 종류, 방법에 대해서 배우기보다 스스로 공부하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수업 방식이었어. 멋지고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어. 그 옷이 또 그들에게 자연스레 잘 어울렸어. 나는 어딘가 어색했고 내 누추한 옷차림이 부끄러웠어. 가끔 나는 옷을 입고 말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빤스만 입은 채로 말하고 있더라.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후회와 자책으로 가득했어. 

 

 마지막 학기쯤 되면 옷이 자연스러워질 줄 알았는데 처음 때와 같이 불편했어.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챙겨 입었는데도 보폭 넓게 걸으며 나아가는데 나는 한 발자국 걷는 것도 어려웠어. 이건 의지의 문제라 생각했어. 어느 시기든 고비가 있잖아. 이 고비만 넘기면 수월해질 거라 생각했어. 어떻게든 옷에 내 몸을 맞춰보겠다고 노력했어. 내 몸을 옷에 맞추려다 보니 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 언제나 나의 못났고 부족한 부분만 찾아서 비난하고 미워했어. 세상에 수많은 옷이 있을 텐데 나한테 맞는 옷이 없을 것 같아 겁이 났어. 점점 내가 존재해야 하는 의미를 모르겠는 거야. 우주 관점에서 인간은 내가 광안리 바닷가에서 보는 모래가 같은 게 아닐까. 모래 한 알이 없다고 해안가 생태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듯, 나 한 명 없다고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실존적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 물음표 살인마가 등장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잖아. 올해 ‘나는 왜...‘로 시작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했어.


나는 왜 의지가 없나.

나는 왜 의욕이 없나.

나는 왜 욕심이 없나.

나는 왜 인내심이 없나

나는 왜 노력하지 않나.

나는 왜 현명하지 않나

나는 왜 대학원에 왔나

나는 왜 살아야 하나

나는 왜 똑똑하게 살지 않나.

나는 왜x46382946의 질문

 

 질문을 할수록 나는 없어지고 내 안에 질문들로만 가득했어. 그 어떤 질문에 답은 하지 못하고 대신에 이 옷을 입기 싫다고 소리 내어 말했어. 그날 내 안에 답하지 못한 질문들을 토해내듯 울었던 것 같아. 그날뿐만 아니라 올해 자주 그렇게 울었어.

 

 나는 토해내듯 울고 옷을 벗고 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그동안 삶을 지탱해 온 독서, 일기, 운동, 규칙적인 식사와 수면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더라. 스크린 타임 시간은 매주 늘어났고 일기도 안 쓰고 운동도 안 했어. 밥도 한 번에 몰아서 냉동식품이나 군것질로 때웠어. 그러다 깨질 듯한 두통을 열흘 정도 앓고 나서야 건강이 우선이라는 진부한 사실을 깨닫게 됐어. 통증 없이 잠드는 것과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했어. 어긋났던 것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어. 


 20대 초반 때 기억나지? 그땐 나한테 어울리는 옷 스타일을 몰라 쇼핑몰에서 모델이 입은 것만 보고 사서 실패한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 부직포 코트, 소매가 길거나 통이 넓어 내 속옷이 훤히 보이는 상의, 바지를 샀는데 점프 수트로 입어도 될 만큼 긴 바지,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나 있는 니트. 손바닥만 한 치마, 실밥이 오조오억개인 셔츠, 쌀 포대 같은 원피스, 입었는데 너무 따가운 니트, 쇼핑몰 모델이 입었을 땐 예뻤는데 내가 입으니 얼굴이 흙빛이 되는 옷 등.  

 

 그 돈과 시간이 쌓여 나는 자연스레 나한테 어울리는 옷과 어울리지 않는 옷을 분간할 줄 알게 되었어. 옷 스타일이나 나한테 맞는 일이나 처음엔 똥인지 된장인 분간할 수 없는 게 이치인가 봐. 실패하면 기분이 당연히 구리지. 하지만 그 기분을 오랫동안 간직하지 말자. 대단한 각오를 할 필요도 없어. 다음엔 그 옷을 안 사면 돼. 그리고 정신 건강이 안 좋을 땐 ‘나는 왜..’로 시작하는 질문 금지. 이건 정신 건강이 좋을 때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 아마 평생 답을 찾고 새로운 답이 업데이트되지 않을까.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조급해하거나 후회하지 말자.이동진 평론가 말했듯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살자.


작가의 이전글 건강해서 몰랐던 사실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