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인지 된장이 찍어 먹어봐야 하는 나에게 보내는 편지
올해가 딱 100일 남던 날 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보다 마무리 잘하고 싶었어. 휴대폰 디데이 앱에 ’2023년 마무리 잘하기!‘로 설정했어.
그사이 대학원을 그만두기로 했어. 갑작스러운 결정은 아니었잖아. 대학원 입학할 때부터 나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어. 처음엔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라 어색한 게 아닐까, 입다 보면 내 몸에 맞게 늘어날 거라 믿었어. 그 옷 말고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몰랐거든.
대학원은 옷의 종류, 방법에 대해서 배우기보다 스스로 공부하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수업 방식이었어. 멋지고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어. 그 옷이 또 그들에게 자연스레 잘 어울렸어. 나는 어딘가 어색했고 내 누추한 옷차림이 부끄러웠어. 가끔 나는 옷을 입고 말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빤스만 입은 채로 말하고 있더라.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후회와 자책으로 가득했어.
마지막 학기쯤 되면 옷이 자연스러워질 줄 알았는데 처음 때와 같이 불편했어.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챙겨 입었는데도 보폭 넓게 걸으며 나아가는데 나는 한 발자국 걷는 것도 어려웠어. 이건 의지의 문제라 생각했어. 어느 시기든 고비가 있잖아. 이 고비만 넘기면 수월해질 거라 생각했어. 어떻게든 옷에 내 몸을 맞춰보겠다고 노력했어. 내 몸을 옷에 맞추려다 보니 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 언제나 나의 못났고 부족한 부분만 찾아서 비난하고 미워했어. 세상에 수많은 옷이 있을 텐데 나한테 맞는 옷이 없을 것 같아 겁이 났어. 점점 내가 존재해야 하는 의미를 모르겠는 거야. 우주 관점에서 인간은 내가 광안리 바닷가에서 보는 모래가 같은 게 아닐까. 모래 한 알이 없다고 해안가 생태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듯, 나 한 명 없다고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실존적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 물음표 살인마가 등장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잖아. 올해 ‘나는 왜...‘로 시작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했어.
나는 왜 의지가 없나.
나는 왜 의욕이 없나.
나는 왜 욕심이 없나.
나는 왜 인내심이 없나
나는 왜 노력하지 않나.
나는 왜 현명하지 않나
나는 왜 대학원에 왔나
나는 왜 살아야 하나
나는 왜 똑똑하게 살지 않나.
나는 왜x46382946의 질문
질문을 할수록 나는 없어지고 내 안에 질문들로만 가득했어. 그 어떤 질문에 답은 하지 못하고 대신에 이 옷을 입기 싫다고 소리 내어 말했어. 그날 내 안에 답하지 못한 질문들을 토해내듯 울었던 것 같아. 그날뿐만 아니라 올해 자주 그렇게 울었어.
나는 토해내듯 울고 옷을 벗고 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그동안 삶을 지탱해 온 독서, 일기, 운동, 규칙적인 식사와 수면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더라. 스크린 타임 시간은 매주 늘어났고 일기도 안 쓰고 운동도 안 했어. 밥도 한 번에 몰아서 냉동식품이나 군것질로 때웠어. 그러다 깨질 듯한 두통을 열흘 정도 앓고 나서야 건강이 우선이라는 진부한 사실을 깨닫게 됐어. 통증 없이 잠드는 것과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했어. 어긋났던 것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어.
20대 초반 때 기억나지? 그땐 나한테 어울리는 옷 스타일을 몰라 쇼핑몰에서 모델이 입은 것만 보고 사서 실패한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 부직포 코트, 소매가 길거나 통이 넓어 내 속옷이 훤히 보이는 상의, 바지를 샀는데 점프 수트로 입어도 될 만큼 긴 바지,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나 있는 니트. 손바닥만 한 치마, 실밥이 오조오억개인 셔츠, 쌀 포대 같은 원피스, 입었는데 너무 따가운 니트, 쇼핑몰 모델이 입었을 땐 예뻤는데 내가 입으니 얼굴이 흙빛이 되는 옷 등.
그 돈과 시간이 쌓여 나는 자연스레 나한테 어울리는 옷과 어울리지 않는 옷을 분간할 줄 알게 되었어. 옷 스타일이나 나한테 맞는 일이나 처음엔 똥인지 된장인 분간할 수 없는 게 이치인가 봐. 실패하면 기분이 당연히 구리지. 하지만 그 기분을 오랫동안 간직하지 말자. 대단한 각오를 할 필요도 없어. 다음엔 그 옷을 안 사면 돼. 그리고 정신 건강이 안 좋을 땐 ‘나는 왜..’로 시작하는 질문 금지. 이건 정신 건강이 좋을 때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 아마 평생 답을 찾고 새로운 답이 업데이트되지 않을까.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조급해하거나 후회하지 말자.이동진 평론가 말했듯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