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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압살롬 Mar 11. 2023

L2: 사랑하는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저는 언제쯤에나 당신께 말을 걸며 울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와 저는 말이 없을 땐 다정스럽고, 입을 떼면 눈물짓는 사이인지 모르겠어요. 

사랑이 지나쳐 울음이 되면 그 마음은 더 이상 사랑 같은 게 아닌가 봐요. 


할아버지, 한국에 가면 할아버지를 뵈러 혼자 가지 않을 거예요. 

지나온 시간을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을 아쉬워한 적은 없어요. 오히려 둘만 있을 때가 더 불편했던 것 같아요. 시간은 저에게도 빠르게 흐르지만, 할아버지의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바삐 흘러가는 걸 모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단 둘이 있을 때면 할아버지와 저 사이에 존재하는 너무나도 당연한 시간의 격차가 더욱 불안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외려 할아버지와 저는, 모두가 번잡스러운 식사 자리에서 복도를 가로지르다 한 번씩 마주치는 눈인사로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가는 사이었던 듯해요. 


가장 그리운 순간은 티브이 앞에 앉은 할아버지의 손을 어루만지던 때. 부러 불편하게 좀 더 몸을 당겨 앉아 팔뚝을 한번 대어보곤 했어요. 그렇게 포옹 대신에 할아버지 어깨에 기대어 부리던 응석도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가 되었네요. 하지만 여전히 할아버지의 가녀린 어깨의 다정한 촉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답니다. 


식사자리 후 방에 들어가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할머니께서 제 방을 찾고, 그럼 할머니는 제 방 침대에 앉아 호들갑스럽게 제 자랑을 하는 것을 즐기곤 하셨죠. 또 그러다 보면 엄마가 방으로 들어오고, 그즈음엔 할아버지께서 마치 우연인양 거실 복도를 지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할아버지까지 좁은 방에 들어앉으면 그제야 저는 명절이 무엇인지를 알았답니다. 제가 가족과 나누고 싶었던 것은, 그런 아무런 무게감 없는 다정스러움 그 자체였으니까 말이에요. 


눈은 사랑으로 천진하게 반짝이지만 꼿꼿하게 제 침대에 걸터앉은 할아버지의 익숙한 모습이 서럽게도 생생하네요. 제가 아는 사랑은 그토록 다정하고 편안한 얼굴을 한 노인의 얼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랍니다. 이게 제 사랑의 이상이자 원형이고, 민낯이고 허상이겠지요. 할아버지께서 주신 이 싦을 어느 곳에 쏟아내야 받은 마음에 반이라도 값할 수 있을까요. 아득하고 막막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다 알게 되겠죠. 할아버지가 주신이름에 값하는 삶이 무엇인지 말이에요. 


하여간 할아버지. 그래서 할아버지를 뵈러 친구들과 가요. 할아버지도 저도 워낙 따로 만나지를 못해서 제대로 보여드릴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새로 만든 가족이 누구인지를 보여드릴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 무덤가에서나 낼 수 있게 된 용기가 헛된 일이 아니길 바라요.  보고 싶은 할아버지. 그날 울까 웃을까 아니면 웃다가 울까 싶어요. 할아버지께 이런 제 서글픈 모양새가 닿을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할아버지 그 먼 곳에서도 꾸준히 걸어와 주세요. 저 역시 계신 곳으로 차근차근 한 발 나아가고 있으니. 우리 같은 곳에서 뵐 수 있을 때까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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