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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압살롬 Jun 16. 2023

L3: 사랑하는 할아버지께

현충원에서

      

할아버지, 오늘은 할아버지가 계신 곳에 다녀왔어요. 아무 말 없이 가서 아무 말도 없이 돌아왔답니다. 할아버지를 볼 이유가 아니라면 밟지도 않는 서울 땅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도 여전히 할아버지로 인해 밟게 되는 서울이 이제는 서글프게만 느껴져요. 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지금 제가 있는 이곳과 가까운 대전 현충원으로 오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외려 서울 현충원에 안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기쁜 마음과 서글픈 마음이 동시에 일어났답니다. 돌아가셔서는 온전히 저만의 가족이길 바랐는데, 할아버지께선 언제나 그랬듯 더 높은 곳으로 당신 자신을 이끄시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께서 훨씬 기쁜 마음으로 그곳에 속하셨을 줄 알기에, 저 또한 뿌듯한 마음으로 계신 곳으로 향했어요.     

 

사랑하는 할아버지. 저는 그곳이 제 어린 날의 놀이터인 줄 몰랐어요. 이곳이 할아버지 삶의 종착지인 줄을, 당신 자신께서 모르셨던 것처럼 말에요. 현충원 입구에 들어서보니 할아버지께서 제가 아주 어릴 때에 종종 이곳에 저를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답니다. 우스운 일이에요. 할아버지께선 저를 유공자들의 무덤 터에 데려와, 친구들의 무덤은 보여주시지도 않고, 손녀딸이 정신없이 뛰어노는 모습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계셨던 거예요. 이 번잡스러운 서울의 한 복판에서 유일한 고요를 간직한 이곳에서, 자신이 지켜낸 생명이 뛰노는 모습을 보며 어두운 기억에 대한 다정스런 위안으로 여기시면서 말이에요. 할아버지의 삶의 끝과 처음이 맞닿는 모습을 제 손으로 이어가고자 해요.


현충원 앞에는 작은 연못과 널찍한 잔디밭이 있었어요. 그리고 저희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가족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잔디밭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도시락을 싸실 줄 모르고, 돗자리를 펴고 두런두런 얘기를 할 성격이 아니셨기에, 제게 분홍 솜사탕 하나를 안기고 말없이 연못가와 잔디밭을 걸었죠. 저는 빽빽이 서있는 비명을 보고도, 무덤인 줄도 모를 나이였고, 할아버지는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구태여 설명하시지 않고 주변을 걷고 또 걸었으셨죠. 왼손을 할아버지의 손에, 오른손에는 솜사탕을 쥐고 디딤돌만 쳐다보며 뛰듯 걸으면, 훅-하고 부는 도시 바람에 솜사탕이 나무꼬치에서 빠져나가 뒹굴었어요. 으아악 하고 구르는 솜사탕을 쥐러 뛰쳐나가면 할아버지께선 아차 싶어 제 뒤를 급히 쫓곤 하셨지요. 저를 붙들기 위해 제 머리통을 감싸 쥐던 할아버지의 두터운 손과 잔잔한 미소를 저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선 언제나 염원하신 것을 얻곤 하셨지요. 그것은 할아버지의 바람이 거칠어서가 아니라 소박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어요. 제가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들 무렵에 할아버지와 크게 뜬 달을 바라보며 공원을 걷던 날이 생각나요. 할아버지는 그날 같이 평화로운 밤 산책에 대하여 누구에게라도 감사를 드리고 싶어 하셨어요. 그리곤 박정희 대통령을 떠올리시한 두 마디를 더하셨어요. 그분덕에 정말로 밥을 먹게 되었다고, 굶지 않는 세상이 왔노라고, 말하시며 제 통통한 손을 꼭 잡으셨어요. 할아버지께 밥이란 것은, 또 우리가 먹는 것 만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현실이 얼마나 큰 기적이었을까요. 그리고 지금 할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 무덤가에 함께 몸을 누워계셔요. 저도 할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저희의 몸을 덥힌 식사에 감사하고, 저의 생명을 가능하게 해 주신 돌아가신 분들께 감사해요. 그럼 저의 죽은 몸도, 언젠가 할아버지 옆에 가서 누일 수 있게 될까요.


할아버지가 계신 봉화당 안 아주 해가 고, 높고, 밝았어요. 다만 할아버지의 사진이 누락되어 있다는 게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요. 어느 때보다 선명한 채도를 갖고, 할아버지는 당신 계서 있어야 할 곳에 그렇게 잔잔히 계셨어요.     

 

사랑하는 할아버지, 그날은 저희가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저는 벌써 할아버지가 계신 곳이 좋아요. 계신 곳으로 향하는 길목에 즐비하던 하얀 꽃나무와, 그 주변을 노니는 흰나비도 좋았어요. 무덤가의 흰나비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지요. 터무니없는 말 일지라도 저는 또 한 번 의미가 태어나는 그리움의 순간에 저를 내어 맡깁니다. 거칠고 천한 삶에 진실한 의미가 되어주는 나의 할아버지. 나비의 날개 같은 섬세한 마음으로 주신 삶의 강인함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할아버지와 당신의 친구분들로 이루어진 이 자리에서, 저는 제가 할 줄 아는 가장 자랑스러운 재주로, 어른들 계신 곳을 향하여 감사의 뜻을 전해 보아요.


제 손으로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에도 한이 없음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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