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우리가 지나온 그 길목에는 우리가 지켜온 웃음과 선의가 찔레꽃처럼 피어있기 때문이겠지.
가뜩이나 우중충하고 눈물 나는 삶인데, 그렇게 깔깔대지라도 않았더라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했을 거야. 이따금 A가 지고 가는 나의 슬픔을 마치 남의 슬픔인양 바라보며 나 자신을 되새기기도 했어.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좋은 거울이고 참을 만한 비극이고 또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삶과의 최종적인 화해를 위해서인가봐.
A는 나에게 충분하지 않은 친구야. 내가 A에게 충분하지 않은 친구인 것처럼 말이야.
무슨 황당한 말이냐고? 내게 없는 것이 A에게 있고, A에게 없는 것이 나에게 있어.
서로의 불완전함은 삶의 완전함에 봉사하기 위해서라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아. 그래서 신은 네 안에도, 내 안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둘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를 이어주고 계시겠지.
연극한다고 대낮에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던 그 첫 모습이, 결국 팥죽을 외치며 오열하는 쪽팔린 모습으로 이어지고, 즐거움 앞에서 죄책감을 느끼던 A의 우울한 날들을 지나 결국에는 A가 A인 채로도 견딜만한 오늘에 와있네. 난 이제 A에게 A가 A인 채로도 사랑하는 자기애를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면많이 놀라려나? 함께하는 한 행복했으면 좋겠고, 내가 없더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A의 독립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어엿한 내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요즘이야.
내가 글을 쓴다면, 그건 전적으로 A를 위한 거야. 내 글을 이해해 줄 사람이 A 말고 누가 있겠어.
내 과거를 보고 현재를 보고 미래를 봐주는 사람이야 말로 세상 그 어떤 인텔리보다도 나의 글을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겠지. 때론 A의 고통을 보고 내 고통을 이해한다고 하면 주제넘은 말일까 싶어. 하지만 우리 둘 다 아는 것 같아. 친구는 고통을 함께 들여다보는 사이라는 걸 말이야. 내 기쁨은 태어남과 동시에 하늘로 사라지거나 올라가 버리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생에 기뻐하고 감탄하고 있다는 것을 A의 나아진 기분을 보고서는 드디어 이해하게 되는 거지. "아, 이것은 나의 기쁨이었다"라고 말이야. 마치 직관과 언어가 맺는 관계 갖지 않아? A는 기표를 하고 나는 A의 기의가 되어 줄게. 그러니, 내게 기의가 되어 줄 수 없다 해서 좌절하지 말고 A의 삶을 신나게 살았으면 좋겠어. 나에게 의미는 영원해도 하루하루는 영원하지 않을 거거든. 잃어버린 편지가 그러하듯이, A의 삶은 바삐 다니고 혼란스러울수록 제 몫을 하는 걸 거야. 그러니 A의 혼란과 무질서를 죄악시하지 않길 바라. 거기에 A의 복이, A의 사람들이, A의 삶의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야.
나는 단단하게 원래 있던 자리에서 한 번 나의 싸움을 이어나가 볼게. 가끔 산다는 게 너무 기이하게 느껴져서 어질어질하지만 그때마다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웃어주길 바라. 할아버지가 지켜주신 내 삶과 영혼은,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삶과 영혼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요즘은 그렇게 느끼고 있어. 지혜롭고 맑게 살라는 내 이름은, 때에 따라 필요한 이성과 그에 값하는 맑은 마음 없이는 나는 나일 수 없을 것이라는 멋들어진 주홍글씨야. 어쩌면 헤스터 프린처럼, 가슴에 단 주홍글씨를 알아봐 줄 다른 주홍 글씨를 친구로 기다려왔던 것이었나 봐. 우리의 반가움은 이처럼 죄에서 만나 죄 아닌 것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남은 죄까지도 모조리 밝혀내는 대낮 같은 성찰을 지니라는 운명에서 기인하는 것일지 몰라. 가타리나와 비안네 성인은 그 정도의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 누군가를 벗하지 않았을까?
친구(親舊), 오래 두고 가까이서 사귄 벗 이래. 이보다 우리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쉼 없이 노력한 덕에 누구보다 멀리 나선 우리이길 바라. 그 긴 길에 내가 중도 이탈하지 않도록, 또 A가 뒤로 걸어가지 않도록 서로의 버팀이 되자.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울타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