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압살롬 Mar 02. 2023

L1: 사랑하는 할머니께


할머니 이곳은 더워요. 거기는 어떠신가요?

오늘은 이상한 과제를 받았어요. 글쎄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쓰라고 하더라고요.

반가우면서도 슬픈 숙제예요.

떠날수록 깊어지는 사랑은 기억으로만 가까이할 수 있나 봐요.

할머니로 인해 오게 된 이곳에서, 할머니 없이 할머니에 대한 글을 쓰게 되다니요.

얄궂게도 할머니는 이별까지도 공부하라시네요.

할아버지보다 조금 덜 사랑해서 평생을 서운해하던 울 할머니.

이 숙제에서만큼은 할아버지보다 할머니를 일등으로 삼을게요.


몹쓸 이야기를 아름답게 이야기하는 능력이, 비극을 희극으쓰는 재주가 우리에겐 있잖아요?

     

할머니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내 단짝이고, 내 방패고, 내 보물이던 당신을, 어떤 언어와 어떤 조심스러움으로 그 날것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요. 그래도 한 개 두 개 꺼내는 할머니의 역사가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의 시간과 맞닿으며 어떤 조화가, 예기치 못한 아름다움이 일어날까요?      


여자이자 아내이자 나의 할머니이자 자기 자신으로 살아준 우리 할머니. 내가 사랑한 당신의 모습은 꼿꼿한 자존 그 자체이셨죠. 마지막까지 내가 급한 결혼에 내몰리지 않도록 도와준 우리 할머니, 내 학업의 영원한 후원자였던 우리 할머니. 마지막 순간까지도 할머니 옆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옆에 있어서 너무나 미안했어요. 창가 너머 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을, 나는 이런 최후를 우리의 마지막으로 기억하진 않을게요. 나도 할머니 딸 하고 싶었는데, 딸내미가 매번 남편 말만 따라서 죄송했어요.      


그래도 거실에 붙어있던 뻐꾸기시계 밑에 앉아 티브이를 벗 삼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시간.

그게 내 유년이고, 그게 내 입시였고, 또 내 서울살이었어요.


내 부모가 나의 고난이 두려워 얼굴을 돌릴 때, 항상 내 곁을 우습게 지켜주던 할머니를 내가 어찌 잊을까요. 그 강인한 사랑을 어찌 잊을까요. 할머니 같은 엄마가 될게요. 나약하지 않은 엄마가 될게요.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빛나는 인간이고 싶어요. 때론 남자에게 사랑을 구걸할 줄도 아는 그런 멋진 여자요.      


할머니가 저지른 잘못은 온전히 할머니의 것이기도 하지만, 할머니의 사랑과 함께 대물림되어 제가 갚아야 할  다른 채무가 되기도 하였어요. 할머니께서 청산하지 못하고 가신 잘못은 할머니가 제게 주신 학업으로 갚아 나갈게요. 그러니 할머니 영면에 드시길.


깨끗한 물그릇 떠놓고 행복을 빌어주던 할머니를 기억하며, 저도 그러한 정성으로 할머니를 적어 내려갈게요. 편치 않지만 거짓 없는 순수로 말이에요.

작가의 이전글 L1: 사랑하는 친구 A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