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단짝이고, 내 방패고, 내 보물이던 당신을, 어떤 언어와 어떤 조심스러움으로 그 날것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요. 그래도 한 개 두 개 꺼내는 할머니의 역사가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의 시간과 맞닿으며 어떤 조화가, 예기치 못한 아름다움이 일어날까요?
여자이자 아내이자 나의 할머니이자 자기 자신으로 살아준 우리 할머니. 내가 사랑한 당신의 모습은 꼿꼿한 자존 그 자체이셨죠. 마지막까지 내가 급한 결혼에 내몰리지 않도록 도와준 우리 할머니, 내 학업의 영원한 후원자였던 우리 할머니. 마지막 순간까지도 할머니 옆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옆에 있어서 너무나 미안했어요. 창가 너머 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을, 나는 이런 최후를 우리의 마지막으로 기억하진 않을게요. 나도 할머니 딸 하고 싶었는데, 딸내미가 매번 남편 말만 따라서 죄송했어요.
그래도 거실에 붙어있던 뻐꾸기시계 밑에 앉아 티브이를 벗 삼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시간.
그게 내 유년이고, 그게 내 입시였고, 또 내 서울살이었어요.
내 부모가 나의 고난이 두려워 얼굴을 돌릴 때, 항상 내 곁을 우습게 지켜주던 할머니를 내가 어찌 잊을까요. 그 강인한 사랑을 어찌 잊을까요. 할머니 같은 엄마가 될게요. 나약하지 않은 엄마가 될게요.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빛나는 인간이고 싶어요. 때론 남자에게 사랑을 구걸할 줄도 아는 그런 멋진 여자요.
할머니가 저지른 잘못은 온전히 할머니의 것이기도 하지만, 할머니의 사랑과 함께 대물림되어 제가 갚아야 할 또 다른 채무가 되기도 하였어요. 할머니께서 청산하지 못하고 가신 잘못은 할머니가 제게 주신 학업으로 갚아 나갈게요. 그러니 할머니 영면에 드시길.
깨끗한 물그릇 떠놓고 행복을 빌어주던 할머니를 기억하며, 저도 그러한 정성으로 할머니를 적어 내려갈게요. 편치 않지만 거짓 없는 순수로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