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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익 Feb 28. 2022

<디아벨리 변주곡>과 베토벤적 유머

뒤틀린 유머 속 광기와 숭고함

베토벤이 디아벨리의 왈츠 테마에 대해 붙인 33개의 변주곡, 일명 <디아벨리 변주곡>. 원제는 <33 Veränderungen über einen Walzer von Diabelli>. 나는 이 곡의 드라마적 본질이, 부제에서 적은 바와 같이, <뒤틀린 유머 속에서 합일을 이룬 광기와 숭고함>에 있다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베토벤이 통상적으로 변주곡을 일컫는 이탈리아어 Variationen 이 아니라 독일어인 Veränderungen을 사용했음에 주의해야 한다. Veränderungen을 굳이 영어로 번역하자면 transformation 정도가 될 수 있겠는데, 이러한 명명은 베토벤의 전략이라고 생각된다. 그 전략이 목적하는 바는 주제의 선율이나 리듬, 조성, 템포 등의 일부만을 변주시키는 '음형 변주'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으로서 예술가 개인의 상상력과 대담성이 담보된 '성격 변주'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애초부터 베토벤은 공통 관습 시대의 예술가들이 으레 변주곡을 인식하고 작곡하던 방식대로 디아벨리 변주곡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D. J. Grout의 <서양음악사>는 이 곡을 두고 '숭고한 것과 기괴한 것이 공존하며, 또한 심원한 것과 매우 소박한 것이 공존한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적확한 표현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면 뒤틀린 유머와 은밀한 숭고함이 동시에 공존하는 천(千)의 얼굴을 본다.


주제는 매우 간단하다.


<디아벨리 변주곡>의 주제 중 일부

베토벤이 처음 디아벨리로부터 이 주제를 받아 들었을 때 이를 두고 '구두 가죽'이라고 비하한 것이 쉬이 납득된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 특출날 것 없는 주제를 갖고서 서양 예술 사상 가장 뛰어난 변주곡 중 하나인 <디아벨리 변주곡>을 작곡해 낸다. 베토벤이 누구인가. 금빛 과일 같은 멜로디가 아니라 밀알 같은 동기 하나만으로도 드넓은 우주를 창조해 내는 작곡가가 아니던가. 베토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중적 평론, 즉 "베토벤의 가장 탁월한 재능은 아름다운 선율이 아니라 주제 동기를 유기적으로 전개시켜 나가는 방식과 함께 다양한 작은 소재들에서 대곡을 빈틈없이 구성해 내는 능력이다." 은 진실로 옳은 표현이다. 예컨대, 그의 5번 교향곡의 1악장은 그 유명한 동기를 유일한 소재로 하여 작곡되지 않았던가.

베토벤 교향곡 5번의 opening motif



<디아벨리 변주곡>에서 베토벤은 이 유머러스하고도 단순한 왈츠 주제를 뒤엎고 뒤틀리게 변용시키면서  33개의 변주곡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유머'는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비엔나 왈츠,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와 같은 단순 명료하고 쾌활한 유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뒤틀린 유머'에 가깝다. 그것은 때로는 뒤틀릴 대로 뒤틀려 버린 나머지, 일말의 웃음기조차 잃은 채 '괴수적인 광기'를 드러내기도 하며, 광기에 젖은 웃음이 끝난 뒤에는 폐부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신적인 숭고함'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볼테르의 <캉디드>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이 베토벤에 의해 합일(合一)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면 나의 이러한 감상이 보다 시각적으로 와닿을 수 있을까.


슈베르트가 장조로부터 한 없는 슬픔과 우울의 정서를 발굴해 내어 그 유명한 "슈베르트적 우울"이라는 미학 효과를 창출해 냈다면, 베토벤은 이 곡에서 광기와 숭고함의 변증법적 지양을 이루어낸 성과로 "베토벤적 유머"라는 미학 효과를 증명해 낸 셈이다. "웃음", "경쾌함", "환희", "설움", "상실", "혐오", "부적절함", "신실함", "진실됨", "신적 충만", "고요함", "신비주의적 미지" 등이 디아벨리 변주곡 안에 온전히 녹아들어 있다. 이들 정서는 무작위적으로 배열되어 있다기보다는 베토벤의 개인적 구상에 의해 안전하게 배열되어 있다. 그 배열적 특이성으로부터 바로 '광기와 숭고함의 변증법적 지양으로서의 베토벤적 유머'가 창출되는 것이다.   


베토벤적 유머는 폴라톤의 소크라테스가 폴리테이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추방해야 한다고 지적한 그 광기 어린 '힘(Kraft)'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내고 변용 및 발전시킨다. 건전한 시민이 지을 만한 후련한 웃음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이 유머는 니체적인 의미에서의 ' 모든 기호적 능력(symnolic power)을 무화시키는' 그 힘에 맞닿아 있다. 단순 명료한 왈츠 풍의 주제가 지니는 유쾌함이 변형 및 전개됨에 따라 광기를 띠게 되고, 그 광기가 극에 달하여 숭고함과 천박함을 모두 아우르게 된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이르러 베토벤은 소박한 미뉴에트를 통해 닫히지 않고서 영원히 열려 있는 미지의 감각을 불어넣어준다. 열린 결말을 제시하는 것이다. 베토벤이 정작 근대를 살았던 작곡가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이러한 나의 초근대적 감상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베토벤의 개성과 음악 자체가 '시간적 한계를 뛰어넘는 진보'의 성격을 띤다는 점을 참조한다면 나의 해석이 마냥 이상하게 들리지만은 않으리라 믿는다. 당장 후기 피아노 소나타와 후기 현악 사중주만 들어 보아도 우리는 그에게서 끝나지 않은 진보의 감각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이 이 곡이 지니는 '숨겨진 천(千)의 얼굴'을 읽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에 걸맞는 사려 깊은 연주, 그리고 마찬가지로 사려 깊은 감상이 요구된다. 나 역시 중학생 때부터 이 곡을 알아왔지만 제대로 이 곡을 독파해 본 적이 없고 여전히 알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근래 나의 관심을 부쩍 끌어 마침내 이 포스트를 적고야 말게 만든 연주가 있으니, 바로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Piotr Anderzewski)의 연주(link)이다.



안데르제프스키가 사색적인 연주의 정수를 보여준다면, 특유의 리듬적 생명력과 힘으로 악곡의 본질적 구조를 명료히 드러내는 것으로는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Sviatoslav Richter)의 연주(link)가 으뜸이다. 1986년 프라하 실황이다.


 

독일 피아니즘의 거장이자 가벼운 유머를 그 특질로 하는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의 연주(link)도 주목할 만하다. 열악하다 못해 삭막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생기와 생명력을 들려준다.



정교함과 세심함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러시아 피아니즘의 우뚝 선 거장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연주(link) 역시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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