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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익 Jul 10. 2021

<앎의 나무>: "앎을 알면 얽매인다"

"앎을 알면 얽매인다"

: 마투라나 & 바렐라의 <Tree of Knowledge>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그 사람이 우리 중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창세기 3장 중 일부를 재구성. 판본: '히브리어 헬라어 직역 성경', 출판사 '말씀의집')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열매를 먹고 자기의 앎을 성찰한다. 자기의 앎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사람은 '앎에 얽매인다.' 학습 생애는 이러한 얽매임이 재귀적으로 정교화되는 과정이다.


여기서 '선악과나무'(tree of knowledge)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마투라나, 바렐라. (2007). <앎의 나무>. (최호영 역). 서울: 갈무리


급진적 구성주의자로 알려진 생물학자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서구 문명의 심장인 성경의 선악과 비유를 빌려와 인간을 이해하는 '새 판 짜기'를 선보인다.


책의 부제 'The Biological Roots of Human Understanding' 답게 이 책은 구성주의 관점에서 생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설명하는 고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다. 쟁송의 여지가 있지만 사회를 설명하는 렌즈로도 활용된다.


이 책이 교육학에 기여한 바는 상당하다.

학습이 '저 바깥에' 있는 것을 내 안으로 주입하는 일이 아니라 나와 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구조 접속'이라는 지적은, 학습의 제 성격을 포착하는 데 공헌한 바가 크다.

'자기 생성 조직'(autopoietische Organisation)이라는 메타포는 사회공학 정책이 교육체계라는 자기 참조적 시스템을 흔들지 못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구성주의는 학습이론의 중핵 관점 중 하나로서 당당히 교과서에 실려 학생 중심 수업을 설계하는 교사들을 충분히 괴롭히고 있다.


이렇게 구성주의는 학습, 교수, 교육에 대한 그동안의 이해 조건에 파열을 내고 새 호흡을 불어넣어온 것이다.


이와 같은 학문적 기여 때문인지 스스로를 구성주의자로 정체화하는 교육학도가 많지만 정작 그중엔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이들이 많다. 이 포스트는 그런 교육학도를 <앎의 나무>로 안내하는 길잡이다.


'우리의 앎이 어떤 얽매임을 창발 하는지'에 관한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설명을 그들의 말을 빌려 들여다보자.



학습은 유기체와 환경 간 구조 접속,

앎은 생물체의 효과적인 행위


인식이란 효과적인 행위다. 다시 말해 생물이 자신의 존재 영역에서 지니는 작업효과다(p. 37).


특정 맥락에서 효과적인 (또는 적절한) 행동을 관찰할 때 우리는 인식 또는 지식이라는 말을 쓴다. 이때 특정 맥락이란 관찰자인 우리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던진 물음에 따라 규정된다. (...) 학습이나 기억을 환경에서 어떤 것을 '입수'한 결과로 생긴 행동변화 현상으로 보기 쉬운데, 이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구조 접속, Structural Coupling


학습이란 유기체의 작업방식과 환경의 작업방식이 줄곧 어울려 있는 구조 접속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 학습을 '환경의 내면화'로 기술하는 것이 혼란을 빚는 까닭은, 언어능력이 있는 유기체를 기술하는 영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신경계의 구조적 역동성 속에서도 나타난다고 믿도록 만들기 때문이다(p. 195).



"생물은 자기 생성 조직(autopoietische Organisation)"


누가 생물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생물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음을 가정한 셈이다. (...) 생물을 특징짓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말 그대로 지속적으로 생성(erzeugen)하는 데 있다.

autopoiesis (1)
autopoiesis (2)

이런 뜻에서 우리는 생물을 정의하는 조직을 자기 생성 조직(autopoietische Organisation)이라 부르고자 한다(그리스말로 'autos'는 '자기 자신', 'poiein'은 '만들다'를 뜻한다). (p. 56)



'활동'과 '체계'는 같은 현상의 다른 면:

'닭이냐 달걀이냐' 식 논쟁은 이제 그만



세포의 물질대사를 통해 생성된 구성요소들은 그것들을 생산한 변화 작용의 그물 안으로 다시 통합된다. 이때 몇몇 요소들은 이 변화 작용 그물의 테두리를 이룬다. 이처럼 공간 안에 무엇이 생길 수 있게 해주는 구조물을 형태학 개념으로 막(Membran)이라 한다.


머리가 제 꼬리를 물고 있다. 막(Membram)과 역동성은 서로를 창출해내는 조건이다.


막은 구성요소들을 생성하는 변화 작용 그물의 크기를 한정할 뿐 아니라 이 변화 작용 자체에도 참여한다.


역동성(물질대사)과 테두리(막)는 순차적인 현상이 아니라 통합된 활동이다. 이 두 가지가 순차적으로 일어난다고 보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것은 통일된 한 현상의 두 측면이다. 먼저 테두리가 있고 나서 역동성이 있고 또 그다음에 테두리가 있고 하는 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p. 57).



자기 생성 조직은 자기 옷을 스스로 여민다:

Escher "Drawing Hands"


만약 세포의 물질대사 그물 한 군데를 끊는다면 얼마 뒤에는 개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자기 생성 체계의 가장 독특한 점이란 말하자면 자기 옷을 스스로 여민다는 사실, 곧 자신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자신을 주의 환경과 다른 것으로서 구성한다는 사실이다.(p. 58)



자기 생성 체계는 '재귀적 과정'을 띤다:

복잡 시스템을 분석하기 어려운 이유


그러므로 우리는 순환고리인 우리의 인지적 영역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효과적인 행위는 효과적인 행위를 낳는다. (...) 이것은 우리의 과정적 존재를 특징짓는 인지적 순환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자율적 체계로서 존재하는 방식의 표현이다.

재귀함수의 전형적 모습 중 하나: 우리가 산출하는 세계는 끊임없는 재귀과정 속에 자기 기원을 감춘다

우리가 산출한 세계는 끊임없는 재귀 과정 속에서 자신의 기원을 감춘다. (..) 유기체의 역동성이 작업적으로(operationally) 안정되는 방식에 이런 역동성의 발생과정이 구현되어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생물학적 기제의 원리이다. 생명활동은 자신의 기원에 대한 기록을 간직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해야 세계를 산출하는 기제를 밝힐 설명을 언어로 내놓는 일뿐이다. (p. 271-272)


그러므로 인간의 인식활동은 효과적인 행위로서 생물학적 영역에 속하지만 또한 언제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움직인다. (...)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인식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산출한다. (p. 273)



그래서... 앎을 알면 얽매인다


성경에 씌어 있듯이 아담과 이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바람에 다른 존재로 바뀌어버렸고 다시는 처음의 무죄 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 (...) ‘타락’ 하기에 앞서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는 벌거벗은 몸을 통해 나타난다. 벌거벗고 돌아다닌 그들은 그냥 안다고 하는 무죄 상태에 있었다.

신과의 끊어짐: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 탄생하는 장면

‘타락’한 뒤 그들은 자기들이 벗었음을 알았다. 곧 그들은 자신들이 '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들의 앎을 깨달았다. (...) 앎을 알면 얽매인다

(pp. 273-275)



결론:

구성주의는 '객관주의'와 '유아론' 사이에서 중간지대 찾기



독자들은 마치 '사실'이나 물체가 저기 바깥에 있어서 그것을 그냥 가져다 머리에 넣으면 되는 것처럼 인식 현상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늘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려는 모든 것의 근본이다(p. 33).

양 극단 사이에서 '줄 타기' (영화 <왕의 남자> 중 한 장면)

두 극단, 다시 말해 표상주의(객관주의)와 유아론(관념론)에 빠지지 않도록 또다시 줄타기를 해야만 한다. 이 책의 한 목표는 바로 그 중간 길 찾기였다.(p. 270)




독자의 첨: 구성주의로 사회과학 하기, 그 아찔한 줄타기


생물학자 마투라나와 바렐라 (Maturana & Varela)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사회현상에 자신들의 '자기 조직화 이론'을 적용할 가능성을 닫아놓지는 않았다. 예컨대,

"자기가 따르는 법칙이나 자기에게 고유한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체계는 자율적이다. 우리는 오직 생물만을 자율적 존재로 보자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자율성이 생물을 가장 잘 드러내는 측면들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p. 59)


사회이론가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체계 이론(system theory)으로 이름 난 사회이론가 니클라스 루만은 30년에 걸쳐 사회체계의 작동 양상을 추적하며 여러 저서를 남겼는데, 그는 사회체계가 '자기 스스로를 조직화한다'고 주장했다. 후기 근대적 인식관에 부합해 보이는 세련된 분석이다. 이러한 논리의 배경에는 마투라나의 구성주의가 있다.


다만 마투라나의 구성주의가 사회이론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는 쟁송성이 있다. 어느 누구도 그 정당성을 학문적으로 신뢰롭게 일반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루만의 시도를 경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기 조직화 이론이 자연과학을 넘어 사회과학에 이르는 초학문적인 상상력을 일으킨다는 점은 여전하다. 루만의 뒤를 이은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구성주의 또는 자기 조직화의 관점에서 인간과 사회를 설명해 왔다.


장상호 <학문과 교육>, 한숭희 <교육이 창조한 세계>

교육학에서는 장상호의 <학문과 교육>, 한숭희의 <교육이 창조한 세계>가 대표적이다.


최근 들어 루만이나 마투라나보다는 '복잡계 사고'가 사회현상으로부터 자기 조직성을 읽어내려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듯하다.


구성주의와 복잡계의 공통점과 차이는 다음과 같다: '둘은 모두 자기 조직화에 의한 시스템의 창발에 관심을 갖는다. 다만 구성주의는 생물학에 뿌리를 두는 반면에 복잡계는 생물학을 포함해 물리학, 생태학, 경제학, 교육학 등 다양한 학문을 아우르는 우산 개념에 가깝다.'

교육학에서 복잡계 접근을 활용하는 학자로는 <Engaging Minds>(1,2,3판)의 저자 Brent Davis 등이 있다. 루만의 시도가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비판을 받은 것처럼, 복잡계 사고의 '초학문적 범용성' 역시 적지 않은 자연과학자에게 도전을 받는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사이를 잇다가도 떼어놓는 아찔한 줄타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



(끝)



Source: 마투라나, 바렐라 저. (2007). 『앎의 나무』. (최호영 역). 서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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