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에 비행기 표를 사고, 부랴부랴 숙소를 예약한 다음날 인천공항(ICN)으로 향했다. 7~8년 만에 다시 찾는 발리지만, 이번에는 오롯이 요가만을 위해 우붓에 가는 게 목표였다. 처음에는 1일 3요가를 꿈꿨는데, 지나치게 욕심을 부린다는 생각이 들어 오전, 오후에 한 번씩 요가를 하되 매일 다른 요가원에 가보자는 수준으로 합의를 봤다. 대신 틈틈이 마사지를 매일 받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급하게 계획을 세운 4박 5일간의 길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그 어떤 여행보다 크게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은 원하는 바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남들이 많이 가는 이 나라에, 저 도시에 나도 가봐야지, 하는 생각만으로 여행을 결심했는데이제는 여행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행복하고, 누구를 만나야 즐거운지가 확고해졌다. 그런취향에 기반을 둔 여행은 준비한 기간, 계획의 밀도 등에 관계없이 매 순간을 충만하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행의 방향성이 뚜렷하니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도 어떤 것을 포기하고, 어떤 것을 취해야 하는지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 또한 이점이다.
발리 덴파사르 공항(DPS) 도착 예정 시간은 오후 9시. 입국 비자를 받고, 짐을 찾고,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다 보면 오후 10시가 훌쩍 넘을 것이다. 공항에서 우붓까지 1시간 이상을 택시로 이동해야 하는데, 그 밤에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하지 않을까, 혹은 기사가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싶지 않아 공항 근처 숙소에서 1박을 택했다. 소위 '눈탱이'를 맞기 싫어 데이터만 가능한 유심을 한국에서 미리 구매해갔것만, 무슨 이유에선지 작동을 하지 않아 공항에서 잡은 와이파이로 호텔까지 가는 길을 구글맵에서 찾은 뒤 여기에 의존해야 했다. 다행히 호텔은 출국장에서 나와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었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비행기에서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지만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 1년 만에 떠난 해외여행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 계획형 인간의 무계획 여행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아 꽤나 오래 뒤척거렸다. 소음에 민감한 편이다 보니, 간간히 비행기 이륙하는 소리와 웅웅 거리는 에어컨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지만, 귀마개를 끼고 나니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우붓 홈스테이
아침을 8시에 먹겠다고 해놨더니 모닝콜이 왔다. 메뉴는 나시고랭과 오렌지 주스. 꿉꿉한 습도를 견디기가 쉽지 않아 중정에 있는 수영장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빨리 우붓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갔다. 우선 작동하지 않는 유심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안내서가 시키는 대로 모든 조치를 해봤지만 여전히 먹통. 결국 한국 시간으로 오전 9시 30분, 인도네시아 시간으로 오전 8시 30분부터 유심을 판매한 업체에서 상담이 가능하다니 그때까지 기다렸다. 업무 개시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길래 여러 차례 독촉했더니 현지 시간으로 오전 9시가 넘어 답이 왔다. 통신사에 요청해 유심을 리셋했다고 하던데, 그 덕분인지 인터넷 접속이 가능해졌다. 그제야 샤워를 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여행 시작 전에는 버스를 타고 우붓으로 가볼까 생각해 봤는데, 열악한 도로 사정과 무더운 날씨는 나의 도전정신을 한 번에 꺾어버렸다. 참고로 우붓까지 버스를 타면 800~1500원, 택시를 타면 2만~3만 원으로 비용 차이가 꽤 있다. 물론 소요 시간 차이도 크다. 버스 타면 2~3시간, 택시 타면 1~2시간. 나는 돈으로 시간과 편안함을 사기로 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택시를 부를 때 주로 고젝, 그랩을 사용한다. 비교해 보니 고젝의 가격이 조금 더 저렴한 편이었다. 첫날 오전 10시께 공항에서 우붓으로 이동할 때는 톨 14k 포함 271k(약 2만4천원), 마지막날 오후 1시께 우붓에서 공항으로 이동할 때는 공항 입장료 12k 포함 311.5k(약 2만7천원)으로 공항 향발에 약간의 가격 차이가 존재했다. 기사에게 물어보니 새벽에는 우붓에서 공항까지 차로 4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발리에서는 극심한 교통 체증을 디폴트로 설정해 놓고 우붓에서 공항까지 넉넉하게 1시간 30분~2시간은 생각하고 이동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것이다. 우붓에서 공항으로 갈 때는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길 건너편에 있는 중국인 2명이 합승을 제안해서 1인당 100k씩 부담했다. 이득! 고젝으로는 오토바이도 부를 수 있다. 오토바이를 타는 게 가격도 훨씬 저렴하고, 이동 시간도 줄일 수 있다. 위험해 보이는 것은 차치하고 모르는 사람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 그를 껴안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 서비스를 애용하는 것을 봤다.
3천원짜리 미고랭 맛도 최고
우붓에 잡은 숙소는 구글 평점이 5점으로 평이 좋은 '홈스테이'였다. 가격이 아주 매력적이지만, 호텔과 같은 수준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개중에 가장 비싼 디럭스룸으로 잡았는데 4만원대 중반이었다. 발리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수질이었는데, 다행히도 이 숙소에서는 다이소에서 사간 샤워필터에 변화가 전혀 없었다. 참고로 발리에서는 1박에 10만원이 훌쩍 넘는 호텔에서도 물을 틀자마자 샤워 필터가 새까맣게 변해버렸다는 도시 괴담이 있다. 방 전체 조명이 어둡고, 화장실 조명은 특히 더 어두웠다. 변기나 샤워장이 호텔처럼 완전무결하게 깨끗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냄새가 난다거나, 배수가 이뤄지지 않는 등 위생상 문제는 없었다. 작은 냉장고가 하나 있는데 그 소음이 어마무시하게 커서 잘 때는 코드를 뽑아버렸다. 에어컨 소음 역시 어느정도 있었기 때문에 귀마개를 사용했다. 조식이 포함돼 있었지만, 메뉴가 토스트/팬케이크에 과일주스와 커피 정도로 빈약한 편이었다. 맛은 있었다만, 마지막 날에는 오전 일찍 요가 수업도 있고 해서 아침을 건너뛰었지만 그게 전혀 아쉽지는 않을 정도의 맛이었다.
날씨 이야기도 한 번 짚고 넘어가야겠다. 발리는 11월부터 3월까지 우기라고 한다. 10월 말~11월 초에 떠난 나의 여행 기간에도 강우, 강풍이 예고돼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목표는 요가이니, 빗소리를 들으면서 요가를 하는 것도 운치가 있겠다는 생각에 크게 괘념치 않았다. 월요일에 발리에 도착해 토요일에 출발하는 일정이었는데, 실제 비가 내린 날은 수요일 단 하루에 그쳤다. 그마저도 오후 요가 수련이 끝나갈 무렵에 내리기 시작해 활동에 큰 지장은 없었다. 요가 후 발 마사지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조금은 험난했지만, 면세점에서 사 온 우비가 나를 든든하게 지켜줬다. 마지막 날에도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 비가 쏟아지긴 했으나 30분 정도 내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게 개었다. 내가 날씨 요정이었다고까지 포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동남아시아에서 우기에 내리는 비는 잠깐 쏟아지고 멈출 가능성이 있으니 여행 전부터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는 듯하다.처음에는 장화까지 가져오려다가 무게 때문에포기했는데, 현지에 와보니 후덥지근한 날씨와 비가 잠깐 오다 멈출 가능성 등을 고려했을 때 굳이 장화까지 가져올 필요는 없는 듯하다.
일몰이 아름다운 꾸따 해변
월요일 밤늦게 도착해 금요일 밤늦게 떠나는 일정이었기에 우붓에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사실상 4일을 체류했다. 우붓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을 맡겨놓고 Fipper에 쪼리를 사러 갔다. 큰 기대를 안 하고 갔는데 의외로 색감이 마음에 들어서 하마터면 4켤레를 살 뻔했다. 과유불급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2켤레로 만족했다. 2켤레를 사면 1켤레를 공짜로 준다는 데 사이즈가 S밖에 없단다. 알겠다며 그냥 받아왔는데 사이즈가 225mm 정도 되나 보다. 도저히 밖에 나다닐 수 없는 사이즈여서 체크아웃할 때 숙소에 두고 왔다. 요가원은 총 4군데를 경험해 봤다. 지난 발리 여행 때 너무나 좋은 추억을 남겨준 Radiantly Alive에서 3회권을 끊었고 럭셔리한 리조트촌 속 화려한 외관의 Alchemy Yoga, 논을 바라보며 소규모로 수업하는 Ubud Yoga House, 우붓 요가의 아이콘 Yoga Barn에서 각각 한 번씩 수련을 했다. 우붓에서의 첫날과 마지막날에는 요가를 1번, 두 번째 날과 세 번째 날은 요가를 2번씩 들었다. 각 요가원의 특징은 별도의 후기를 작성하려고 한다. 결론은 각자의 매력이 있고 모두 좋았다는 것.
'요가의 성지' 우붓에서 4일간 매일, 그중 이틀은 하루에 두 번씩 요가를 하다 보니 그 덕에 이름도 모르지만, 한국에서 낑낑거렸던 기억이 나는 여러 도전 자세도 성공할 수 있었다. 요가에서는 튼튼한 하체가 중심을 잡아주는 게 중요한데, 탄탄해진 허벅지 근육이 마치 나의 무게를 흡수라도 한 듯 몸이 가벼워져 중력을 거스르는 게 수월해진덕분이다.지난번에 우붓에 왔을 때만 해도 머리서기에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모든 수련에서 아무문제 없이 시르사아사나를 홀로 해냈다는 게 가장 뿌듯했다. 올해 목표 자세로 삼은 핀차마유라아사나는 선생님의 도움 없이는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는 벽을 실감할 때는 좌절하기도 했다.그러나조금씩, 그렇지만 분명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기회였다. 요가에 완성은 없다. 수련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요가를 수련한다(practice)고 표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를 이번에 우붓에서 두 번이나 들었다. 수련을 계속 이어가다 보면 어느샌가 그 자세에 한 발짝 가까워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옴 샨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