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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골 May 15. 2024

개똥철학 스승

내가?

 누군가에겐 석가탄신일이고 누군가에겐 스승의 날이고 누군가에겐 달콤한 수요일 휴일인 오늘, 오전에 모르는 번호로 날아온 문자메시지 속 누군가가 날더러 선생님이란다. 내가?


 꽤 지난 일이지만, 한때 학원이나 인터넷강의 강사를 직업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을 꽤 좋아했고, 무엇보다 어렸을 적부터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나타나주신 여러 은사님들 덕에 숱한 고비를 넘어왔기에 (대학원에 있는 지금까지도!) 비록 모자란 능력이지만 나를 거쳐간 아이들 중 몇 명에게라도 그와 비슷하게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꽤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가 자기소개서 같은 곳에 쓰여질 법한 대외적인 이야기들이고. 

 나는 원래 아주 제대로 알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일견 그럴듯하게 들리게끔 말하는 재주가 어느 정도 있고, 학부모님들이 얼핏 보기에 꽤나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와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험상궂은 외모 덕에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도 내게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또 과외나 학원 아르바이트가 당시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일 중 시간 대비 수입이 가장 좋았다. 워낙 모든 일에 의미부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처음엔 이런 시시껄렁하고 뻔한 이유로 시작했더니 위와 같은 대외적 사유들이 추가가 되더라. 


 그 당시 나와 같이 아이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대학생들이 방학에 가장 하기 좋은 대외활동으로 '삼성드림클래스'라는 것이 있었다. 대학생들이 약 한달여 간 교육 인프라가 충분치 못한 지방 소도시 아이들과 합숙하며 영어, 수학 등의 기본과목을 가르치고 여러 활동을 진행하는 프로그램 되시겠다. 일단 간판이 대감집이고, 봉사활동 시간이 인정되며, 무엇보다 장학금 명목으로 25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이 지급되었기에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 눈은 이 돈으로 만들어졌다) 아마 나와 같은 시기에 대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보고 지원도 해봤을 법한 나름 유명한 프로그램이다. (여담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활동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투자하는 시간대비 엄청 메리트가 큰 활동인지는 잘 모르겠다. 대학생 입장에서 250만 원을 한달만에 모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이 활동은 한 달을 집에도 가지 못한 채 꼼짝없이 그 캠퍼스 안에 지독히 말을 안듣는 중학생 아이들을 지도하며 갇혀있어야 한다!) 


 그렇게 2019년 1월 한달 간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캠퍼스에서 대학생 3인이 한 반을 담당하여 예비 중학교 3학년 10명 정도를 맡아 영어 및 생활지도를 담당하는 강사 활동을 했었는데, 10명 모두 시끄럽고 말은 안 들어도 참 착했다. 그리고 그 중 한명 여러가지 의미로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는데 (편의상 A로 칭한다) 그렇게 생각한 건 다른 두 명의 동료 강사 형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처음 아이들을 마주한 건 캠프 입소 후 2일차가 되는 날이었는데, 하루 사이에 A는 무리의 대장 노릇을 하며 담당 강사인 우리들에게까지 귀여운 허세를 부리는 중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나를 포함한 우리 반 강사들은 모두 학원 등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본 경험이 있는 나름 숙련된 조교들이었고, 마냥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는 말랑한 사람들도 아니었기 때문에 A를 금방 제압(?)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렇게 한번 관계를 정립하고 나니 반 아이들 중 가장 똑똑하고, 가장 시끄럽고, 가장 활발한 아이가 되었다. 


 특히나 나머지 두 강사가 모두 나보다 형들이었던지라(...) 반의 기강을 담당하는 귀찮은 역할을 꼭 나에게 맡기곤 했었고 자연스럽게 A와 가장 많은 대화를 하는 것도 내 역할이었다. 나는 수업시간에도 꼭 내가 맡은 과목인 영어만 가르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영어를 '가르치기'보다 다른 것을 더 많이 '이야기해주었다'. 그때의 나는 나름 학교를 4학기째 다니면서 학교 간판만 믿고 꺼드럭거리는 속 빈 강정 같은 사람들에 이골이 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영어, 수학을 포함한 공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건 결국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일 뿐이고, 지금 너희 나이에 앞으로 성인이 되어서 어떤 모습의 어른이 되어야 할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를 많이 고민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속된 말로 개똥철학 강의를 많이 했었고 심지어는 학교공부가 포함되지 않은 인생 포트폴리오를 짜서 나를 설득시키면 내 영어 수업 안들어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제안까지 했었는데, 다행히도(?) 그런 아이는 없었다. A에게는 그게 퍽 인상깊었는지 내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한참을 고민하다 나에게 공부와는 관련이 없는, 지금까지도 나도 답을 잘 모르는 인생에 대한 질문을 마구 던져대곤 했다. 


 그리고 오늘, A는 어느 새 자기가 한달 동안 선생님이라 불렀던 사람에게 실례가 될까 바로 전화드리지 않고 메시지부터 남긴다며, 어른의 예의를 차리는 스물 한 살이 되어 나에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꼴랑 한달, 그것도 제대로 된 선생의 역할을 한 것도 아닌데 선생님 소리를 듣는 것이 낯간지러워 '이제 형이라 불러~'라며 너스레를 떠는 내게 스물한 살의 A가 내민, 그때는 내지 않았던 멋들어진 인생 포트폴리오를 들으며 그동안 느껴본 적 없는 뿌듯함이 차올랐다. 처음보는 선생님들과 기싸움이나 할줄 알던 A는 학업을 놓은 것도 아니었지만 거기에만 매몰되지 않았고,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전진하는, 패기넘치는 20대 청년이 되어 있었다. 한 명이라도 좋으니 이 아이들이 공부나 성적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단단하고 멋진 어른이 되길 바라며 던졌던 나의 개똥철학 강의의 씨앗이 잘 다져진 땅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도록 멋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부럽고, 부끄러웠다. 2019년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양 그럴듯하게 아이들에게 내 철학을 설명했다는 점에서는 형편없었지만 그때까지의 내가 해온 선택을 내 철학에 빗대어 설명하는 데에는 한 점 부끄럼도, 망설임도 없었다는 점에선 지금의 나보다도 나았다. 어렸지만 동시에 젊었고, 생각이 좁았지만 그 좁은 안에서는 확신이 있었으며, 서투르지만 다시 일어날 에너지가 충분했다. 그때 아이들에게 말하던 '멋진 어른'은 그 당시까지도 내가 목표로 삼고 있던 모습을 투영한 것이었는데, 20대가 마무리 되어가는 아직도 한참 먼 이야기인 것만 같다. 2019년에 미완성인줄도 모른 채 확신에 차 던졌던 이야기들은 여전히 미완성인 채로, 심지어는 미완성인 것을 아는 채로 남아 있다. 처음에는 부끄러움이 '선생님'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낯간지러움에서 기인한 것인가 했지만 A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는, 20대 초반의 나에게 멋쩍은 표정으로 사과할 수 밖에 없었다. 


 "쌤 술좀 드십니까? 삼쏘 한번 해야죠~" 하며 까불대는 A의 인생 포트폴리오에 기대어서, 실로 오랜만에 내가 누군가와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만족감, 그리고 아직 한참 더 성장해야 한다는 성취욕을 느꼈다. 아무래도 맛있는 고기집을 좀 찾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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