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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랄 Jan 24. 2023

삶은 찰나의 선택

죽음에서 돌아오던 순간에 대해

십 분 정도를 의미 있는 유투브로 소일하고 싶던 어느 날, '유퀴즈 온더 블록'의 빼앗긴 인재 편을 보게 됐다. 뉴욕의 정신과 의사라는 나종호님은 공부에 매진했던 그의 청춘 이력만으로도 내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오랫동안 공부하며 사람을 공부해 왔고, 그의 공부를 실현할 사회를 찾아서 미국에 남았다. 사회에서 '자살'이란 말을 분명하게 써주는 것이 되려 사람들의 자살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란 그의 의견에 공감이 갔다. 완곡한 표현으로 선택한 '극단적 선택'이란 말은 자살이 선택지 중 하나처럼 여겨지게 만들어서 옳지 않다는 말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생각해보면 동양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에 비해 완곡한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데에 비해 서양 사람들은 보다 직접적으로 상황을 표현하는 편이다. 영어권에선 commit suicide 란 표현을 쓰는데 commit 동사에 그릇된 범죄를 저지르다란 의미가 있어서, 자살을 저지른 것을 범죄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너무 공감 가는 말이었다. 자살을 할만큼 우울했고 생이 두려웠던 사람들은 아마도 마음 속에 자살이란 단어를 품고 다녔을 수 있다. 견디다가 안 되면 나에겐 마지막 선택지가 있어, 이런 마음으로. 만일 자살이 '자기 살해'로 여겨진다면, 좀 더 확대해서 가족을 죽이고 자기 생을 마감하는 경우들이 '가족 살해'로 정확히 인식된다면, 사람들은 자살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인생의 마지막 모습 중 하나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과 자기 인생을 파괴하는 자기살인自己殺人은 달라도 크게 다르다. 사회적 방어막으로서 자살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확실히 세워두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인 것 같다. 그러나 자살을 행하기까지 인생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지, 그 고통의 무게를 남들이 함부로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열여덟 살 때, 아버지가 크게 교통사고가 나서 의식을 잃으면서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게 됐는데, 그 바람에 우리 가족은 거의 전부를 다 잃게 됐다.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나고 집은 야반도주를 해야 했다. 하루 아침에 안정적이던 생활이 모두 무너졌다. 어머니는 돈을 구하러 다녀야했기에, 나는 집에서 열세 살이던 동생을 데리고 2박 3일 동안 짐을 쌌고, 아버지 수술을 앞두고 단 둘이 제사를 지냈다. 사고가 나기 직전 모의고사에서 전교 1등을 차지했는데, 그 후로 책을 들여다보지 않아서 속절 없이 10등급을 거쳐 14등급까지 내려갔다. 하나만 틀려도 생야단을 하던 어머니도 기운이 없어, "이제 다 끝났구나"하는 작은 한숨만 쉴 뿐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삶을 믿지 않게 됐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살뜰하지 못했고 일만 하는 일벌레였지만, 적어도 자기가 생각한 자기 삶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 수출이 장려되던 시절에 일본 수출을 이뤄내서 은탑산업훈장을 받았고, 해외여행이 부자유스럽던 시절에 독일에 기술이전을 받으러 가서 유럽을 시찰하고 온 인재였다. 기업의 오너 일가가 아니면서 이사로 승진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것도 기술과 지식으로 승부를 본 최연소 승진자였다. 그러나 어느 새벽 접대를 마치고 술에 취해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한 부주의한 운전자에게 치였고 그 후 모든 것을 잃게 됐다. 그나마도 다른 행인들이 있었기에 운전자가 뺑소니를 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의사는 다리를 절단해야 생존확률이 올라간다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자존심 센 아버지는 다리가 없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고 버텼다. 결국 수술 시 발생할 수 있는 쇼크사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생존 20%의 낮은 확률에 매달렸고, 아버지는 천운으로 목숨과 다리를 모두 건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삶은 이전처럼 아버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다리뼈는 산산히 부서져서 제대로 다시 재건되는데 2년 이상 걸렸다. 다리뼈가 모두 붙고 나자 원래 다리보다 길이가 짧아져서 조금 절게 됐다. 그 때 아버지가 만일 신에게 다리를 내어주었더라면 아버지의 나머지 삶이 좀 덜 괴로웠을까, 막연한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아니 그보다 앞서 계속 그 회사를 다닐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이 회장에 취임한 후 아버지가 내쫓기다시피 회사를 나오지 않아도 됐더라면, 그래서 자기 사업을 하느라 목숨을 걸고 살지 않아도 됐더라면 그 밤에 그 먼 데 있던 횡단보도를 안 건너도 됐을까. 그랬다면 아버지는 그 끔찍했던 사고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누구를, 무엇을 원망해야 좋을지 몰라서 나는 끊임없이 아버지의 과거로 돌아가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지만, 그 사고가 아버지의 인생에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기에 다른 일들은 모두 다 개연성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당최 인과 관계가 없이 일어난 것처럼 여겨지는 인생 최악의 사건을 인간이 피할 수 있는 방책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아버지는 여름에 교통 사고가 났고, 우리 가족은 가장 괴로운 가을과 겨울을 보냈다. 계절이 어떻게 가는지, 밥은 어떻게 먹는지, 숨은 어떻게 쉬는지, 서로가 서로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어머니는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돈을 벌었고, 나는 학교를 이탈하지 않는 것으로 가족에게 더 큰 짐을 안겨주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일 주일 동안 머리를 빗지 않고 간 적도 있었는데, 어느 날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교실에 걸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었다. 사람이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내 삶에 승부를 걸고 매일 약진하고자 애쓰던 내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권태에 찌든 불행한 여학생이 거기 있었다. 하필 그 때 반장이라 차렷, 경례 ,구령을 붙여야만 했다. 나는 책상에 쓰러져 자다가 일어나서 친구들이 쿡쿡 찌르면 구령 로봇처럼 일어나서 차렷, 경례, 구령을 한 다음 다시 엎드려 잤다. 며칠 그러다 그나마 귀찮아져서, 그리고 선생님들한테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부반장한테 그냥 니가 다 하라고 시키고 계속 엎어져 잔 적도 있었다. 그 쯤 되면 혼날 법도 한데, 선생님들은 저럴 애가 아닌데 저러니 몹시 이상하다고 걱정스럽게 수군대시기만 했다. 심각한 불행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제자 - 장래가 촉망되는 기대주였으나 이상하게도 하루 아침에 다른 인격체가 된 듯한 무서운 고2의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 서로 미루다가 담임 선생님이 총대를 매셨고, 나는 선생님들을 괴롭히는 게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순순히 무슨 일이 생겼나 사실 위주로 말을 했다. 나는 동정을 샀고, 그 후로 더 편하게 엎드려 잘 수 있게 됐다. 이제 어른이 되어서 생각해보니 그 때 그 선생님들이 고맙다. 어떤 위로도 나를 달랠 수 없다는 것을 어른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 분들 중 아마 나처럼 아직 어린 시절에 이렇게 심각한 사고를 겪은 사람들은 없었을 것 같다. 있었다면 아마 다가와서 자신만의 위로를 건넬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들은 섣부른 위로가 아이를 더 다치게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남의 불행을 쉽게 재단하지 않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나는 겨울에 바닥을 찍었다가 벚꽃이 피던 계절에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꽃 피는 5월에 다시 내 자리를 찾았다. 9개월 간의 방황이 내게 남긴 생채기가 컸다. 그래도 남아 있는 시간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12월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15층 베란다에서 아래를 오래오래 쳐다보았다. 죽으려는 자에게 옷가지도 거추장스러워서 아주 얇은 옷만 입고 밖으로 나갔었는데, 마음을 고쳐먹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마 한 30분 가량이 지나 있었나보다. 엄마가 부엌에서, "이 추운 날 얇게 있고 어딜 그렇게 다니다 오니" 하고 타박을 주었다. 방금 딸이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좀 어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삶이 내게 건네는 말처럼 여겨졌다. 전보다 훨씬 가난해졌으나 집이 여전히 따뜻하게 나를 감싸안아 주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그 날, 스스로 몇 가지 결심을 했다. 여기서 생을 연장하고자 한다면 몇 가지 전제를 세우고 그것을 스스로 약속하는 것이다. 다시는 이 극단까지 오지 않기, 죽을 용기로 열심히 살기. 이 베란다 끝에 설 용기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음. 나는 역설적이지만 내 용기를 자신에게 증명하였음. 당장 하루를, 몇 달을 살아갈 이유를 찾아서 살아가기. 찾아낸 삶의 이유가 폼 나지 않고 허술한 것이라 하더라도 정해졌다면 그것에 집중하기. 삶이 시시하고 지루해 보인다면 당장 삶에게 근사한 것을 내놓으라고 재촉하기보다는 조금 시간을 두고 다음 장면을 기다려주기. 무엇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삶은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고, 나는 다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 것. 그것은 그렇기에 노력이 허무하고 아무 것도 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설령 그런 순간이 다시 오더라도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임. 다시 비워지고 채워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삶이기 때문임. 다만 강제로 텅 비어버린 순간 예전과 똑같은 영화를 바랄 수는 없는 것임. 다른 모습으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생의 다른 막을 열어야 함. 여기까지 생각하자, 또 다른 위로가 떠올랐다. 아마도 내 앞으로의 인생에서 이것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일은 없을 거야. 여기가 바닥인 걸 거야. 설마 이보다 더 아래가 있을라구. 있으면 어쩌지? 아니야 설마. 있어도 오늘을 견뎠으니 그 때도 견딜 수 있을 거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거 같아. 여기가 바닥이야. 이제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수면이 나올 때까지 천천히 올라가고, 거기서부터 숨을 쉬기 시작하면 돼.


1992년에서 93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이었다. 다시 살아야 하는 어떤 멋진 이유가 떠오르길 바랐지만, 공부만 하던 고2 여학생에게 세상은 좁았다. 일단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그 후 다른 목표를 찾아보기로 했다. 고작 대학이 목표라니, 폼 나지 않게. 그래도 그 대학이 어떤 곳일까, 들어가면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호기심이 생기긴 했다. 나는 그래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다. 우연히도 그 해에 수능이 처음으로 도입됐다. 그래서 나는 8월, 11월 두 번 수능을 보았다. 11월에 절대 점수는 20점이 내려갔지만, 상대 점수가 전국 3%에서 1%로 상향했다. 요즘 같이 상대 점수로 학교를 간다면 원하는 모든 학교와 학과를 갈 수 있었을 테지만, 이 시절은 절대 점수를 인정하던 덜 합리적인 때라 8월 점수로 진학을 했다. 지나간 내신을 회복할 수는 없는 것이라 수능 공부에 더 매진했고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대학도, 부모도, 학생도 모두 혼란을 겪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미 한바탕 내적 혼란을 겪고 난 뒤라 세상의 혼란 따위는 하나도 어지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수시와 정시 사이에서 나는 정시 중에서 본고사를 보는 학교들을 택했다. 내신 비중을 줄이기 위해서 한 선택이었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수시로 합격하고, 본고사를 보지 않는 정시로 합격해 나갈 때, 나는 학교 지하에 있는 생물실로 내려가서 본고사를 준비했다. 여학교에 화장품 회사에서 와서 학생들에게 이런저런 화장품을 파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교실에 가득 찬 화장품 냄새를 등지고 지하실로 내려가면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그렇게 나는 크리스마스 따위도 반납하고 1월까지 입시를 진행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내게 길었다. 수면 위로 올라가는 시간이 몹시 더디게 느껴졌다. 그래도 잃어버린 9개월 중 몇 달은 나중에 받을 수 있었던 셈이라 차라리 고마웠다. 나는 그렇게 절대절명의 순간에서 겨우 빠져나왔고, 견뎠고, 버텼다. 운이 따랐고 노력을 기울였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 모든 순간이 찰나였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 보길, 만일 그 때 원했던 것을 얻지 못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다시 절망했을까? 아마 다른 목표를 세웠겠지만,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은 이전과 같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 시절, 나는 내가 우울의 터널을 빠져나가는 그 과정이 좋았다. 내가 마음 먹은 대로 되어가는 그 과정의 기쁨을 즐겼다. 그 이후의 삶 역시 그 때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정말 고맙게도 그 이후, 그 때처럼 괴로웠던 순간은 내 삶에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그에 걸맞게 힘든 순간들은 몇 번이고 더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추운 베란다 끝을 생각하며 버틸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 때 얻은 것은 내 삶의 큰 자산이 된 회복탄력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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