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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쥐새댁 Sep 01. 2020

우리만의 집을 갖는다는 건

힐링이 되는 신혼집

5년 차 신혼에 접어들었다.

서울에 집을 장만한다는 건 보통의 사람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 인생 최대 최고 금액의 쇼핑 같은 것. 정해둔 예산은 늘 그렇듯 한 없이 부족하게 느껴지고, 신상 아파트를 만나면 심장이 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2015년 가을, 신혼 첫 집을 구하던 날이 기억난다.

남편과 2년 연애를 했는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남편은 집 이야기를 했다.

“어떤 집에서 살고 싶어?”


우리 둘 모두 부모님과 같이 살아와서 집은 내가 정한 적이 없었다. 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건 그 돈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당연히 집값은 얼마인지,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 30년 동안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남편(당시 남자 친구)의 질문을 시작으로 우리 둘은 함께 살 집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곧 결혼을 하고 신혼집을 구하는 결혼 준비의 과정으로 진입했다.


둘 다 집에 관심이 생기면서 가용 예산과 함께 마음에 드는 집을 구경 다니며 데이트를 했다. 서울의 한 신축 아파트 단지. 이 아파트는 이제 막 주변 신축 아파트가 생기며 대단지를 형성해가고 있는 곳이었다. 인근 아파트들이 다 지어졌을 때는 가격이 훨씬 오를게 뻔했고, 그렇다고 공사판을 지나다닐 엄두도 잘 나지 않았다. 아파트에는 소음방지대책을 세우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퇴근 후 여러 번 이 아파트를 찾았다. 단지 주변에 차를 대고 도보로 걸어가 보기도 하고, 인근 부동산을 찾아 커피도 마시며 물어봤다. 안 되겠다 싶었다. 우리 둘은 놀이터로 가 손주 그네를 밀어주는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아파트 어때요?” 딱 봐도 신혼집 구하러 다니는 우리에게 할머니가 친절하게 이것저것 대답해주셨다.


“여긴 다 좋은데 ***, ***동은 소음 때문에 못살아요. 뒷동도 진동이 느껴진다고는 하는데 내가 사는 ***동은 머리가 깨질 것 같더라고. 거긴 피해서 구해요”


부동산에서는 상가 건물이 가까이에 있어 가장 추천해주던 동이었다. 매물 가격을 확인해보니 해당 동이 다소 낮은 금액에 나와있었다. 부동산은 가격이 모든 걸 말해주는 시장이었다.


재밌는 건 주로 전세입자들은 단점을, 자가 소유자들은 장점을 위주로 말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가격 방어 때문에 그런 듯했다.


주변 아파트 단지를 꽤 여러 번 다녔는데 마음에 확 끌리는 게 없다고 해야 할까. 결혼을 하기로 하고 상견례를 할 때 즈음 본격 집 구하기를 시작했는데, 정작 그때는 그 동네를 가지 않았다. 서울 대단지 신축 아파트에 산 근처에 있고 주변 사립초 환경도 너무 좋았는데 지하철역이 다소 멀었던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동네와 인연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러다 시아버님이 추천해주신 동네를 갑자기 알아보게 됐다. 지하철 3개 라인 환승역인 인근 구축 아파트들이었다.


A아파트는 용적률이 낮아 재건축 시에 아주 큰 장점을 갖고 있었고 계단식이었다. 지하철역에 더 가깝지만 지하주차장이 연결돼있지 않았고, 세대수가 작은 것이 단점이었다. 가격도 B아파트보다 3000만 원 정도 높았다.


바로 옆 B아파트는 재건축은 어려워 보였고 복도식 아파트였다. 다만 정문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있는 초품아였고, 세대수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당시에 야근이 많아서 남편이 시부모님과 집을 보러 A아파트와 B아파트를 둘러봤다. 단지 특성도 중요하지만 해당 매물의 상태가 더 중요했다. A아파트는 꼭대기 탑층, B아파트는 중간층이었다.


남편과 시부모님은 탑층이라는 이유로 B아파트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다음날에는 남편이 야근이라 나 혼자 부동산 사장님과 B아파트를 둘러봤다.

당시 B아파트에는 세입자가 살고 계셨는데, 집주인이 전세 연장을 하며 ‘집이 팔릴 때까지만 계약을 연장한다’고 합의했다고 한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매매계약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집을 보여주는 세입자는 굉장히 예민했고, 바닥에 온갖 아이들 짐이 늘어져있어 밟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안방에는 아이 엄마의 속옷도 막 늘어뜨려놓았더라.


부모님과 살던 집에 비하면 턱없이 좁고, 처음 보는 복도식 아파트 구조가 낯설었다. 오르막이 있는 아파트도 처음이었다. 정리정돈이 돼 있지 않은 집은 벽지에 아이들의 낙서까지 더해져 굉장히 지저분했는데 이상하게 이 집이 내 집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편도 그랬다고 한다. 참 신기하다.


그렇게 우리는 2016년 2월 결혼을 앞두고 2015년 9월에 집을 구했다. 첫 신혼집을 무리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매매로 계약했는데, 당시만 해도 주변에서 다 말리던 때였다. 서울 아파트는 이미 고점이니까 전세로 살라는 조언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당시에 집을 사야겠다고 생각한 건 데이트를 하면서 돌아다닌 아파트 임장기 때문이었다. 주거가 불안정한 것보다 마음 편히 오래 살 집을 구하자는 데 우리 둘 생각이 같았다. (전세를 폄하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그 무렵 회사 동기들이 전세 한 텀을 살고 이사 가면서 지출했던 비용들이 아깝다고 말해준 영향도 있다.


같은 돈에 전세면 더 좋은 컨디션의 아파트에서 살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주거 안정성을 택했다. 그래서 난생처음 복도식 아파트에 살게 됐다.


참고로 결혼을 하면서 집을 사서 살겠다고 하니 부모님들의 걱정이 많았다. 남편과 나는 회사생활을 하며 모은 돈과 생애 첫 주택 저리대출을 받았다. 그리고 부모님들께 결혼식 비용을 아끼고 싶다고 말씀드려서 양가 혼수와 예단을 생략하고 그 돈을 집값에 보태주셨다(증여세 기준 이하의 금액이었다).


신부라면 버진로드가 길고 층고가 높은 호텔 결혼식장에서 결혼하는 게 로망일 수 있는데 우리는 15만원 비용의 회사 결혼식장에서, 생화 대신 조화(생화 비용은 1000만원이었고 조화는 0원이었다)를 선택, 결혼식 당일에도 호텔 말고 신혼집에서 지냈다. 양가 부모님들이 축의금도 모두 내어주서서 그 돈으로 대출도 일부 갚았다. 그렇게 마련한 신혼집이었다. 우리가 하고싶은 대로 양보해 주신 양가 부모님께 감사하다.


다시 계약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집주인은 20년 가까이 한 번도 실거주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지방에 사는 50대 아저씨였는데, 30대인 우리가 집을 매수한다고 하자 기특하기도 하고 그랬나 보더라. 가격이나 일정 모두 우리 사정을 최대한 맞춰줬고, 계약서를 쓰던 날 계약금 이체한도를 넘겨 다음날 보내달라고 편의도 봐주셨다.(물론 잔액이 크진 않았지만) 한 없이 예민할 수 있는 큰돈 거래에 배려를 받으니 이 집이 더 좋게 느껴졌던 것 같다.


20년간 주인이 살지 않은 집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수리 보수를 해주는 대신 저렴한 전세를 놓고 지방에서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나중에도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집은 사는 사람이 애정을 갖고 돌봐야 더 좋은 공간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망가진다는 걸 그 집을 보고 배웠다.


그렇게 12월 잔금을 치르고 전세입자도 무사히 퇴거를 해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갔다. 인테리어는 선택의 연속인데 결정장애(무엇보다 인테리어 미적 감각이 없어 취향조차 없는 경우)때문에 타일 색부터 문 디자인까지 고르는 게 너무 힘들었다.


일을 하면서 결혼 준비를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는데, 인테리어 현장을 매일 가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아빠가 2~3일에 한 번씩 현장을 찾아 체크하고, 골라야 할 일들은 대신 골라주셨다. 내 취향은 단 하나였다. “그냥 넓고 깨끗하게만 해주세요”


지저분한 집이 있던 때와 달리 수리가 끝난 집은 둘이 살기에 아늑하고 깨끗했다. 베이킹을 꽤 오래 해야 해서 결혼식날이 돼서야 처음 집에서 지냈다. 해도 잘 들고 마음에 드는 집이었다. 우리 부부는 집에 애칭도 붙여서 부르기도 했다. **이가 기다리니까 얼른 집에 가야겠다~ 하는 식이었다. 집 덕분인지 몰라도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더더 재밌고 행복하다.


 


4년 동안 이 집에서 행복했다.

짐 빼던 날 아쉬운 마음에 사진을 남겼다. 우리에게 좋은 시간을 선물해줘서 고마워! 인사도 하고 나왔다. 첫 신혼집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두 번째 신혼집을 옮기려 이사를 결심했는데, 다음 편에 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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