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이들이 있다. 괄목할만한 능력을 지녔거나, 독보적인 길을 걸었거나, 세상을 변화시킨 존재가 그러하다. 그러나 최근 예술가들이 주목하는 인물은 그러한 특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한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얼굴을 지녔거나 삶이 비밀로 싸인 사람, 수많은 윤리적 딜레마 속에서 꼭 우리네와 같이 복잡다단한 삶을 헤쳐온 사람. 그들이 주로 서사화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를 어떻게 서사라는 그릇에 담을 것인지, 어떻게 무대에 올릴 것인지는 곧 우리의 딜레마이다. 실체가 사라지고 정황과 기억들만 조각처럼 남은 자리에서 예술가들의 고민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서사화는, 특히 신화를 만드는 것에는 몇 가지 과정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맥락이 제거되고, 장면이 과장되고, 마침내 특정 이미지가 붙고, 대중적인 메시지가 부여된다.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거기에는 어떠한 진실이나 진리가 담겨 있을까? 여기서 해답은 또 다시 '이야기'이다. 필수불가결적으로 변질된 이야기들을 보완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이야기에 이야기를 붙이며, 한 인물의 서사 옆에 다른 인물의 서사를 붙이며 우리는 답이라는 신기루를 향해 더듬더듬 나아간다.
이번에 관람한 작품은 그 가정을 집요하게 파고 든 결과처럼 느껴졌다. 바로 바리데기 설화와 독립운동가 안경신의 이야기를 엮은 연극, <언덕의 바리>이다.
작품은 '얼굴 없는 독립운동가'이자 '여자폭탄범'으로 알려진 안경신의 생애를 다루는데, 꿈과 현실을 오가는 형식이 특징이다. 꿈 같은 공간에서 뱃사공 소년을 만난 경신은 자신을 죽은 여자들을 살릴 수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이후 경신의 생애가 이어진다. 애국부인회 소속이었던 그는 3.1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독립운동가로서의 길을 잃게 된다. 그러나 무장 투쟁을 통해 일제와 맞서겠다는 그의 의지는 그 누구도 꺼트릴 수 없는 것이었다.
경신은 애국부인회가 검거된 후 일본과자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잠시 몸을 숨긴다. 이후 상해로 건너간 후 임신한 몸으로 폭탄을 운반하며 거사를 행한다. 거사가 실패하고 순사들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는 경신은 자신이 그저 무력한 어미일뿐이라며 폭탄범으로서의 행적을 부인하기에 이른다.
경신은 언제나 고여있는 삶, 정체된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삶을 혐오하는 듯보인다.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며 새된 목소리로 외친다. 그리고 언제나 앞서 행동한다. 주변의 만류에도 임신한 몸으로 훈련에 참여하고 폭탄을 운반할 정도의 기개와 빛나는 의지가 있다. 그러나 <언덕의 바리>는 그 지점만을 강조해 장엄한 영웅 서사를 그려내지 않는다. 다만 경신의 생애가 꼭 '언덕'과도 같았음을, 그것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언덕은 땅에서 조금 솟아 오른 지대, 조금 비탈진 곳을 뜻한다. 하늘과 아주 가깝지도, 땅과 아주 유리되지도 않은 곳. 극중 뱃사공 소년의 대사처럼 올라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내려가는 사람은 똑똑히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사실 높은 산과 비교하면 소박하게 그지없다.
그러나 경신에게는 꼭 어울리는 장소이다. 언제나 현실에 단단히 발 붙이고 있으면서도 조금 높은 곳을 꿈 꿔온 사람인 그에게는 말이다. 나의 조국과 나의 동지들의 손을 꼭 붙잡으며 경신은 자신이 있는 곳이 지옥임을 인지한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이상을 상상하기 보다는 그들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조금 더 나은 곳을, 언덕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환한 풍경 정도를 상상한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그것이 경신이 그리도 흔들림 없이 폭탄을 품고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라고 느낀다. 그 누구도 경신을 막을 수 없는 이유는 경신이 자신만의 언덕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언덕의 바리>는 가히 '연극적'인 작품이다. 무의미한 동어 반복이라 느낄지도 모르지만, '움직임'을 통해 타 서사 예술이 표현하기 어려운 현장성을 생생히 구성해냈다. 관객들은 무대를 둘러싼 ㄷ자 형태로 앉는데, 배우들은 관객들의 아주 가까이에서 무대 전반을 생생히 누비며 뛰고 춤추고 노래한다. 때로는 처절하기까지 한 그 '움직임'들은 인물들의 삶의 면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극중 폭탄제조원으로 등장하는 태열은 말한다. '우리는 모두 걸어다니는 뇌관들'이며 모두 '터질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이는 극중의 비일상적이고 과장되어 보이는 움직임들을 설명하는 핵심 대사라고 느낀다. 우리는 모두 연극적인 움직임들을 애써 누르며 살아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대와 다르게 춥고 어둡기 때문에 몸짓을 줄이고 존재를 깎아가는 것뿐 선택지는 없어 보인다.
그렇기에 <언덕의 바리>가 보여준 수많은 움직임들은 더욱 생경하게 다가왔다. 동시에 내게 심장은 어떻게 뛰는지, 팔 다리는 어떻게 움직이며 우리는 어떻게 구르고 또 미끄러질 수 있는지를 다시 일깨웠다. 경신과 동지들의 뇌관 같은 삶, 그리고 그것을 언제든 터질 수 있게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소시민으로 살아가던 나에게 그 꿈틀대는 것들을 몸밖으로 흘려 보내라는 메시지를 던져준 것 같기도 했다.
<언덕의 바리>를 만날 수 있어 행운이었다. 실패와 무력감에 찌들어 있을 때도, 언제든 올라갈 수 있는 언덕을 만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