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2년이 흘렀다. 전세 계약이 만료되고 이사 시즌이 돌아왔다는 뜻이다. 슬슬 안 입는 옷을 버리고, 낡은 세간살이들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부터 나는 온전한 '머무름'의 상태로 진입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떠나야만 한다는 생각, 이곳에 너무 정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 2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갈 것이라는 확신... 그때는 또 어디를 서성거려야 할까 막연히 그리기만 하다가 또 이 시기가 와버렸다. 그런 나에게 '떠돎'이라는 키워드는 어딘가 와닿는 바가 있다.
돌이켜 보면 언제나 떠도는 삶이었다. 바쁜 출근길에 섞일 때면 서로를 스쳐가는 일련의 사람들이 생경할 때가 있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 지 잘 안다는 듯 곧은 걸음을 이어가는 그들 사이에서 간혹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누구나 그래본 적이 있을 테다. 그러나 떠돌기 때문에 만남이 생김을 안다. 떠돌고 난 후에야 작은 머무름이 선물처럼 찾아온다는 것을. 이 사실이 애석하면서도 우리는 물처럼 막힘없이 흐를 수밖에 없다. 떠돎 그 자체가 머무름이 된 묘한 세상이니까.
연극 <떠돔>은 이런 나의 사유에 작은 흔적을 낸 작품으로, 현대 사회의 '떠도는 인간들'을 인상적으로 통찰하고 있다.
극단 즉각반응이 선보인 <떠돔>은 동시대의 사회, 가족, 관계를 다루는 3부작으로 이뤄져 있다. 불안한 사회 속에서 감정적으로 온전히 뿌리 내릴 장소를 잃은 이들은 항시 떠나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불안정을 인생의 동반자처럼 끼고 공간 이곳저곳을 떠도는 이들을 조명하는 연출자의 시선은 그 어떤 때보다 세심하다.
그 중 필자가 관람한 는 관계와 가족을 다루는 2인극이었다. 개기일식 관람 이벤트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관객들은 이벤트에 참가한 손님들이 되어 상황에 몰입한다. 그곳에서 웨이트리스트로 일하는 여성은 침묵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기어코 입을 연다. '새빨간 거짓말'을 가정하며 자신의 삶에 대해 발화한다. 무작정 서울에 올라온 여성은 제 몸 하나 뉘일 곳을 찾고자 수없는 방황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무대에 오른 또 다른 인물, 사내는 나무를 설치한다. 여성의 '말'과 사내의 '설치'가 무대 위에서 묘하게 어우러진다. 목수였던 사내는 딸과 함께 달을 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의 삶 역시 떠돎으로 가득했다. 일거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닌 그는 그저 누군가를 제대로 책임지고 싶었을 테다. 각각의 서사가 평행하게 펼쳐가던 중, 마지막에는 작은 교차점을 만들며 두 사람이 부녀 관계임을 암시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여성의 대사이다. 떠도는 이들은 수많은 비일상성을 목도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 주변을 끊임없이 스쳐가게 된다. 그들에게 거짓과 진실의 경계는 너무도 쉽게 무너진다. 타인의 서사로 넘쳐나는 오늘 날, 우리는 어떤 서사를 취하고 또 버릴 것인지 종종거린다. 여성이 발화하는 삶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 재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시에 그 크고 작은 서사들은 떠도는 이가 잠시 비를 피할 지붕이 되어준다. 누군가 살아온 자리에 둥그렇게 남은 자국으로 우리는 잠시 떠돎을 위로 받고, 또 누군가의 위로가 되어준다. 가 지닌 의미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목표 있는 방황, 목표를 위한 방황, 목표로 하는 방황 그 무엇도 상관 없다. 잠시 누군가가 떠오를 것을 기대하며 개기일식 이벤트에 참여한 관객에게 여성은 그렇게 전하는 것만 같다.
극단 즉각반응은 <떠돔> 3부작이 어떤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보다, 그저 우리 삶의 면면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에 집중했다고 소개했다. 확실히 그러했다. 초연결사회라는 미명 아래 떠돎이 삶의 조건이 된 우리에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