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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Dec 15. 2023

뒤틀린 도시 속 곧은 사랑

<사랑은 낙엽을 타고> 리뷰

사랑마저 불신하게 되는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모든 걸 불신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사랑만큼은 붙들고 싶은 우리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뉴스에서는 매일 누군가의 비극이 흘러 나오고, 거리에는 내 것이 아닌 듯한 삶들이 굴러 다니고, 그럼에도 사랑은 찾아오고, 굴러 다니던 것들이 박혀 어느 새 내 삶이 되고, 또 떠나가고, 알 수 없는 만남들이 교차하며 제각각의 생채기를 긋는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Fallen Leaves)>는 그런 우리의 현주소를 가감없이 그려낸 로맨스 영화로, 저무는 한 해를 마무리 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작품이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Fallen Leaves)>는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이다. 감독 특유의 미니멀리즘한 연출과 묵묵한 시선이 인상적이며, 여느 작품처럼 노동자 계급의 일상을 충실히 다루고 있기도 하다. 장르 정의가 무색하게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로맨틱 코미디로, 차가울 만큼 일상적인 사랑의 풍경을 보여준다.  


작품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헬싱키에 살던 두 노동자 계층의 남녀가 우연히 만나 관계를 지속해가는 이야기이다. 홀라파는 스스로를 '터프 가이'라고 지칭하는 무뚝뚝한 남자이다. 어느 날, 함께 일하는 동료의 꼬드김에 가라오케에 가고, 그곳에서 마트 직원으로 일하던 안사를 만나게 된다. 이후 우연히 재회한 두 사람은 하루를 같이 보내게 되고, 헤어지기 전 안사는 홀라파에게 번호를 준다. 서로의 이름도 모르는 상황. 이후 번호가 쓰인 종이를 잃어버린 홀라파 탓에 둘 사이에는 한참의 공백이 생긴다. 


먼저 논하고 싶은 것은 작품의 배경이다. 2024년 헬싱키, 이곳의 시간선은 어쩐지 기묘하다. 노트북을 사용하고,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를 통해 일을 구하고, 전화를 걸고 받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이 들려온다. 그러나 여전히 전화번호부에서 상대를 찾아야 하고, 스마트폰은 조금도 등장하지 않으며, 2019년 영화가 상영되고 있고, 거리에는 대형 전광판 등을 찾기 힘들다.

분명 안사의 집에는 2024년임을 명시하는 달력이 걸려 있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지하는 시간선을 묘하게 뒤트는 것이 영화의 매력이다. 이러한 감독의 선택은 특정 시대의 특수성을 흐림으로써 둘의 이야기를 보다 보편적인 층위로 확장하는 효과를 지닌다.  


또한 헬싱키가 지닌 장소성도 새롭다. 핀란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부분 긍정적이다. 북유럽 선진국, 꿈 같은 복지 국가, 행복지수 1등의 나라, 성공적인 교육 제도와 충만한 아이들, 눈과 산타 마을이 주는 낭만... 그러나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보여주는 헬싱키는 건조하고 삭막하며 무정하기까지 하다. 출신 감독만이 그릴 수 있는 핀란드의 이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안사와 홀라파는 각자의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된다. 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안사는 유통기한이 조금 지나 팔 수 없는 음식들을 가져가거나, 동료가 가져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를 들킨 후 해고 당하는데, 한 술집에서 설거지 등의 주방 보조 일을 하게 된다. 홀라파는 산업재해의 피해를 입었는데도 술을 마시고 일을 했다며 해고당한다. 그러나 취약한 노동자 계급인 두 사람은 그 속에서도 서로를 발견한다. 사랑을 부정해야만 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가로지르는 인연을 외면하지 않는다. 서로의 소매를 한 번 무심하게 붙잡아 보는 것이 그들이 세상에 대응하는 포즈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무엇보다 '시니컬한 유머'에 있다. 러닝 타임 내내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질 만큼 코미디로서의 매력을 지녔다. 그러나 인물들은 우스운 소리를 하면서도 아무도 웃지 않으며, 시선은 건조하다. 내내 뚱한 표정이다. 애정을 고백하는 순간에도, '당신을 찾아 다니느라 신발 밑창이 다 닳았어요'라고 말하는 순간까지 그러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사랑스러움을 포착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 영화의 독특한 지점이다. 


전쟁 소식이 빗발치고, 술 한 잔 더 마실 돈은 없고, 낭만적인 저녁 식탁을 만들 재주는 없고, 연락은 소원하고, 사랑에 빠질까 싶을 때마다 급작스러운 불행이 일상을 덮치더라도 우리는 인연을 만나고 지나친다. 계절의 끝에 어디에든 발에 치이든 낙엽처럼, 언젠가 바스라지는 사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은 소중히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보여주는 사랑의 풍경이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12월 20일 개봉해 관객들을 찾아간다. 이번 겨울, 연말을 소소하게 데울 이 영화를 놓치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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