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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Mar 21. 2024

다시 쓰는 이야기- 뮤지컬 <피에타>

기독교 예술에 있어 가장 유명한 주제인 피에타는 비탄을 뜻하는 이탈리아어이다. 말 그대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비탄에 빠진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를 주제로 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예수에 비해 거대하게 묘사된 성모 마리아의 신체, 부드럽게 축 늘어진 듯한 예수의 시신, 앳된 마리아의 얼굴 등 이전과는 다른 시도로 주목 받아 현재까지도 예술사의 거대한 족적으로 남아 있다. 


뮤지컬 <피에타>는 어머니 '마리아의 시점에 집중해 이에 대한 연극적 해석을 시도한 작품이다.  


 

<피에타>의 가장 특징적인 매력은 1인극이라는 점이다. 오로지 마리아(김사라 배우) 홀로 무대를 누비며 타 인물과의 상호작용을 그려낸다. 그 너머의 풍경은 철저히 관객의 상상에 맡겨진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마을 사람이, 시냇가를 산책하던 행인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신도 무리가 되기도 한다. 서사 안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포섭된 관객은 사건의 증인으로서 서사에 더욱 밀착될 수 있다. 관객과 활발히 상호작용 하면서도 서사적 공백을 허락하는 것은 뮤지컬 <피에타>가 취한 영리한 방식이다. 


꽃이 피고 얼었던 시냇물이 잠에 깨는 따뜻한 봄날, 평범한 어머니였던 마리아는 장난꾸러기 아들과 함께 밖을 산책한다. 여느 모자가 그러듯 산책도 하고 시냇물에서 첨벙대고 맛있는 음식도 나누며 소풍 분위기를 즐기지만, 작은 걱정들이 불시에 고개를 내밀 때가 있다. 마리아는 말한다. 불의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 되라고 할지, 그저 침묵하고 너의 안전을 최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라고 할지 고민이라고. 그러나 자식은 부모가 그린 지도대로만 가주지는 않는다. 


멋진 청년으로 성장한 아들은 마을을 떠나고, 많은 신도들을 거스릴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를 비난하는 세력도 적지 않다. 세상에 순종하기 보다는 사회 부조리를 지적하고 입바른 소리를 마다 않는 아들은 마치 그것이 제 운명이라는 듯 집과 어머니로부터 자꾸만 멀어진다. 마리아는 연신 하늘을 향해 원망한다.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내버려둘 수 있냐고. 당신에게는 일말의 연민도 없는 것이냐고. 우리의 희망을 이렇게 짓밟을 수 있냐고. 그러나 아들은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살아 숨쉬는 희망이 되기를 택한다. 


하지만 어머니 마리아에게 만큼은 다르다. 그녀는 아들을 기다리면서도 자꾸만 불길한 환상을 본다. 그런 마리아가 마침내 모든 것을 받아들인 순간의 묘사가 참 인상적이다. 군중 속에 섞여 아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마리아는 눈물을 삼키며 조용히 돌아선다. 아들이 피워준 희망의 꽃들은 자신의 침묵과 외면으로 더욱 만발할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그제야 깨달았을 테다. 설령 아들에게 무력하게 순응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해도 그가 걸음을 멈추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후반부의 연출 방식은 특히 매력적이었다. "자식의 손과 발에 못 박히는 소리를 들은 적 있냐"고 무너지듯 외치는 마리아는 세 번의 망치 소리에 무너지고 만다. 사람들의 구원과 희망이 되어주었던 이를, 그랬기에 자신의 품을 기꺼이 떠나보냈던 아들을 세상은 잔혹하게 처벌한다. 마리아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형상처럼, 날 것의 비참한 표정으로 아들을 안아 든다. 그러나 관객은 짐작할 수 있다. 억압받고 가난한 이들을 위했던 그의 마음 만큼은 종교의 교리로,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책으로 이야기로 신화로, 유구히 전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뮤지컬 <피에타>는 별다른 장치 없이도 무대를 꽉 채워낸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다만 아쉬웠던 부분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마리아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해석을 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오직 아들에게만 헌신적인 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 그려진 것에 기대감이 충족되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다. 극중에서 마리아는 오직 아들을 키우고, 기다리고, 쫓고, 그를 위해서만 울부짖는다. 아들의 삶을 떠받치거나 쫓는 해설사의 느낌이지, 마리아 자신의 개인적인 삶은 어떠했는지 드러나지 않는 점이 아쉬웠다.  


그러나 '희생'이라는 키워드, 아들은 더 이상 자신의 품에 갇혀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기꺼이 보내는 마리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울림을 준다. 영웅을 기다리는 삶과 영웅이 되는 삶 사이에서만 고민해온 우리에게, 낳아 기른 이가 영웅이 되고 말았을 때의 아픔을 한 번쯤 재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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