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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Jun 03. 2024

나를 들여다 봐 주오- 슬픔에 이름 붙이기

도서 리뷰

 '슬픔'만큼이나 치사한 단어도 없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대부분의 감정 단어가 그러하지만, 특히나 슬픔은 너무나 많은 맥락들을 지우는 단순한 정의라고 느껴왔다. 슬픈 영화를 볼 때의 슬픔,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냈을 때의 슬픔, 꿈이 좌절되었을 때의 슬픔, 오랜 인연과 헤어졌을 때의 슬픔.... 이토록 다양한 결이 존재하는데 '슬픔'이라는 야속한 단어는 개개인이 느끼는 특수한 감정을 하나로 보편화 해버리는 느낌인 것이다. 


그러나 감정 언어의 미약한 힘에 의존하여 글을 쓸 수밖에 없는 나는 이후 조금 측은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결론이 '그럴 수밖에 없다'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각자의 슬픔을 슬픔이라는 정의에 욱여 넣는 이유는 그것이 그에 대응하는 가장 현명한, 또 적합학 방법이라 느끼는 탓일지도 모른다. 나의 감정을 언어라는 핀셋으로 하나하나 해체하는 것은 너무 괴로운 일이다. 그걸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은 이에게 ―게다가 결코 본질에 다가서지 못 하고 끝없이 미끄러질 게 분명한― 언어를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조금 잔혹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존 케닉이 집필한 감정 사전, <슬픔의 이름 붙이기>는 내게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감정에 분명한 이름을 붙이는 것이, 혹은 적어도 그러한 시도를 지속해가는 것이 슬픔을 더 잘 다뤄낼 수 있는 방법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추상의 옷을 벗고 구체적인 현상으로서 현현되는 감정들이 있고, 그것이 우리를 작은 구원으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보자 가슴이 작게 떨려왔다.




사실 해당 책의 출간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분인 김소연 시인의 추천의 말 때문이었다. 언제나 슬픔이라는 물감의 색과 농도를 조금씩 달리 하며 시를 쓰는 김소연은 '누군가의 알지 못할 슬픔이란 수천 년 동안 어딘가에 놓여 있는 돌멩이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며 글을 시작한다. 겉모습은 그저 돌멩이에 불과하기에 아무도 자세히 살피지도, 어루만지지도 않는 그것은 사실 자신을 묘사할 적법한 언어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어서 저자는 말한다. 슬픔(Sadness)의 어원은 satis, 즉 '충만함'이라고. 슬픔이 단순히 기쁨의 반대말이 아닌, '강렬한 감정으로 마음이 차오르는 상태'를 개괄하는 표현임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슬픔은 그 어떤 감정보다도 강렬하다. 하루종일 눈물만 흘리느라 일상을 영위할 수 없게 할 만큼, 마음이 가득 찬 물웅덩이처럼 무거워져 몸조차 일으키지 못하게 할 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강한 감정이다.


그러니 더더욱 우리는 그 정체를 깨달아야만 한다. 놓여 있던 돌멩이들을 주워 들어 호주머니에 넣고 평소에도 그 무게감을 충분히 느끼며, 잠시 여유가 드는 날에는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찬찬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이처럼 저자는 당당하게 천명한다. '언어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고, '번역 불가능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우리는 그냥 그 일을 하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그렇기에 책 <슬픔에 이름 붙이기>는 사전이라는 형식을 빌려 슬픔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압축해버린 스펙트럼을 다시금 펼쳐 내 촘촘히 톺아보는 작업을 수행한다.


'감정 사전'이라는 이명을 지닌 책인 만큼 이 책에는 그간 슬픔으로 뭉뚱그려졌던 다양한 감정을 한 단어로 정의하고 있다. 단어에는 짧고 긴 해설과 더불어 어원이 붙어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저자가 언어의 한계에 끝없이 부딪치며 남긴 상흔처럼 보여 숙연해질 때도 있었다. 더불어 '이런 걸 나만 느끼는 게 아니구나'라는 마음들을 선물하기 위한 시도처럼도 느껴졌다. 감정에 젖은 무거운 몸을 쉴 수 있는, 작은 나무들을 심어온 끈질긴 흔적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단어를 소개하자면, 우선 '푼트 킥'이다. 푼트 킥은 '인생이라는 게임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어 지금껏의 전략이 먹히지 않는 것을 느끼고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할 때가 왔다고 느끼는 가슴의 떨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최근 대학을 졸업한 후, 다양한 현실의 문제들에 부딪치면서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고 나는 그에 대항할 새로운 무기와 갑옷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에 작은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불확실성은 불안과 공포의 건너편에 기대와 설렘의 맛을 지니고 있다는 걸, '푼트 킥'이라는 단어를 만난 순간 세삼 실감하게 된다.


또 다른 단어는 '하모노이아'였다. '삶이 너무 평화롭게 느껴질 때 스스로 그 고요를 불태우고 싶어질 만큼 두려워 안달하게 되는 마음'은 마치 나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반가운 정의였다. 몇 안 되는 평화가 찾아올 때마다 그걸 충실히 즐기기는커녕, 오히려 그 굴곡없음에 괴롭고 불안해 하던 내 모습을 그저 바보 같다 여기곤 했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정의된 단어로서 다가올 때, 이 기분이 꽤나 보편적일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 깊은 외로움이 조금은 어루만져지는 기분이었다.


<슬픔에 이름 붙이기>는 한 자리에서 쭉 읽어가는 것도 물론 좋지만, 언제든 손 닿는 곳에 두고 읽으면 좋을 책이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 나를 사로잡은 감정이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래서 대응조차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펴 볼 수 있는 책이다. 슬픔에게 또 다른 이름을 허락할 때 우리는 더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깨달음만으로 나는 이 책에 많은 빚을 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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