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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Aug 15. 2024

무너지는 세계의 끝을 붙들며, 논쟁을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 리뷰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소설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이자 유능한 학자였던 C.S.루이스 사이의 논쟁을 소재로 한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이 무대를 넘어 극장가를 찾아온다. 각 배역에 안소니 홉킨스와 매튜 구드를 캐스팅하여 명품 연기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데다 '관객의 지성을 흔드는 영화'로 그 무게감까지 다졌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1939년 런던, 구강암으로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던 노년의 프로이트는 젊은 교수이자 신학자인 C.S.루이스를 자택으로 초대한다. 공습 경보와 전투기의 소음이 끊이질 않는 전쟁의 위기감 속에서도 둘은 삶과 죽음, 전쟁과 종교에 대한 희대의 논쟁을 펼친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시대적 배경이 해당 논쟁의 밀도를 높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해일 속에서 방황하는 인류라는 이름의 연약한 배를 보는 듯한 기분으로 관객은 둘의 논쟁에 빠져든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영국의 전쟁 참여 선언 등의 커다란 갈등 바깥에는 크고 작은 개인의 전쟁들이 도사리고 있다. C.S.루이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심장 가까이의 상처를 얻고 가까스로 살아 남은 탓에 여전히 PTSD 양상을 보인다. 그때 목숨을 잃을 전우의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알 수 없는 도덕적 딜레마를 경험하기도 한다. 


한편, 프로이트는 이미 진행될 대로 된 구강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으며, 심지어 신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 무신론자답게 자살을 고려한다. 더불어 딸이자 아동심리학 전문가인 안나 프로이트를 정신적으로 억압해왔고, 안나는 아버지에게 병적으로 붙들린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버지를 걍한 강한 인정 욕구와 성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둘의 관계를 더욱 극단적인 상황으로 밀어 붙인다. 


둘의 논쟁은 거시적인 주제를 오가는 듯 하지만 그 속에서는 서로의 가장 연약한 살을 찌르는 가시들이 도사리고 있다. 프로이트는 C.S루이스의 전사를 통해 그의 현 상태와 종교적 신념을 신경증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반대로 C.S.루이스는 프로이트가 이룬 부녀 관계의 병적인 지점을 지적한다.  


그들 자신을 환자이자 분석가로 상정한 둘의 대화는 그 때문에 공허한 이론적 근거, 의미 없는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한 껍질 뿐인 논쟁에서 그치지 않는다. 둘의 논쟁은 추하고 끈질기며 집요하다. 자기 자신을 재료로 갈아 넣은 이 논쟁을 통해 우리는 한 세대를 풍미한 지성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본다. 그들 역시 어떠한 생의 진리도 확신할 수 없는 미약한 인감임을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의 제목에 포함된 ‘세션’이라는 단어에 집중하게 된다. 이 영화는 하나의 거대한 세션과 같다. 환자는 전쟁의 과오를 진 히틀러이기도, 인류 전체이기도, C.S.루이스이기도, 딸 안나이기도, 마침내 프로이트 자신이기도 하다. 넓게 펼쳐진 환자 베드에 차례로 몸을 뉘이는 문제적 존재들을 따라가며 영화는 관객이 프로이트의 세션을 가장 은밀한 위치에서 관음하도록 허락한다. 


죽어가는 프로이트의 마지막 세션을 따라간 관객은 마침내 신을 본뜬 조형물로 가득한 프로이트의 서재 속에 자신의 몸을 뉘여 본다. 객관성을 유지한 관객으로서는 분석가다운 냉철함을 견지하다가도, 스스로의 병적인 인간성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는 유신론자 C.S.루이스와 과학의 단단함을 의심해 마지 않는 프로이트 사이에서 인간인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방황할 수밖에 없음을 직감하며, 그러나 삶의 근원에 닿으려는 끊나지 않는 노력은 그 자체로 유의미함을 깨닫는다. 


영화로 돌아온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8월 21일 전국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다.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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