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SNS에 올린 별것 아닌 사진 한 장은 누군가의 하루를 지탱한다. '그래 내가 열심히 돈 벌어야지!'라며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한달까. 하물며 앞뒤 이야기를 과감히 생략하고 점만 하나 달랑 찍어도 그게 글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덕구들은 그 마침표 하나에서 '세상에 우리 최애님 잘 지내고 있군요. 맞아요. 우리도 보고 싶어요' 하는 식의 잠재된 속마음을 읽어내는(?) 놀라운 해독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다. 세상 호들갑도 이런 호들갑이 없다. 물론 이건 내 얘기다(ㅋㅋㅋ)
내 눈앞에 나타나
이런 마음은 사실 나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가 보다. '덕구'라면 일종의 공식처럼 널리 통할 수 있는 이야기다. 얼마 전 엄마로부터 동생 친구가 '계를 탄'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전에 한 번 동생과 함께 야구장에 초대한 적도 있었던 그 아이는 두산 베어스의 찐팬이다. 아버님을 필두로 온 가족이 야구를 좋아한다. 최근 다리가 부러져 ㅊ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받는 친구는 뜻밖의 행운을 잡았다. 바로 그 병원에서 키움 히어로즈 유격수 김하성을 만난 것이다. 기사를 찾아보니 김하성은 허리 통증 때문에 며칠 동안 부상자 명단에 올라있었단다. 아마 ㅊ병원은 구단의 지정 병원이었겠지.
ㅊ병원에서 김하성과 마주친 친구는 아주 신이 나서 난리가 났다고 했다. 엄밀히 따지면 경쟁팀의 핵심 전력이지만, 김하성은 워낙 기량이 뛰어난 데다 메이저리그 무대까지 바라보는 기대주라 프로야구 팬들 사이에서 호감도가 상당히 높다. 아마 친구도 그런 이유에서 김하성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이 무척 신기하고 반가웠을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본 어머님의 증언은 이랬다. "아니 그 자식이 말이야. 집에서는 내가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줘도 아프다면서 찡찡거리더니, 병원에서 김하성을 만나니까 아픈 것도 싹 잊어버린 사람처럼 좋아 죽더라니까?.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 말에 우리 엄마는 "아들 키우는 거 다 소용없다"며 맞장구를 쳤지만, 나는 동생 친구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 내가 아주 잘 알지.
나는 반대로 야구장에서 최애(중 한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겠다)를 만났다. 때는 2019년 한국시리즈 1차전. 당시 2개 담당팀이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에서 나란히 처참한 성적으로 탈락해버린 터라 스트레스가 극한에 다다른 상태였다. 한 시즌 동안 차곡차곡 준비했던 스토리텔링 기사들을 하나도 제대로 쓰질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시리즈 시작을 앞두고는 발목을 접질려 난데없이 깁스를 하게 됐고, 담당팀 없이 맞이한 한국시리즈는 유독 쓸쓸했다. 몸도 마음도 애써 괜찮은 척 잠실야구장을 헤집고 다녔던 1차전 당일은 심지어 내 생일이었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생일에도 쉬지 못하는 삶이란. '이 시리즈만 끝나면 진짜 사직서 쓴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어떻게든 야구장으로 출근해야만 했던 이유가 딱 하나 있었다. 멜로망스 김민석이 한국시리즈 1차전의 애국가 제창을 맡았기 때문이다. 객석을 꽉 채운 2만여 명의 관중들은 모두 선수들을 보러 왔겠지만, 내 눈에는 오직 김민석밖에 보이지 않았다. 행사 전부터 친한 선배들에게 '오늘 제가 좋아하는 가수가 애국가 불러요!'하면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경기 막바지 무렵 그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을 때 부리나케 달려가 사인과 사진을 부탁했다. 너무 떨려서 그날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에게 '저 오늘 생일이에요'라고 말할 용기는 있었나 보다. 그렇게 나의 28번째 생일은 김민석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내 인생 최고의 하루가 됐다.
같은 말 한마디라도
최애들에게는 또 다른 초능력이 있다. 같은 말 한마디라도 괜히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매만져주는 특유의 온기다.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도 그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 유독 더 큰 위로를 받는 경우가 더러 있다.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다. 공연 리뷰 방송에서 관객들의 후기를 읽던 기세중 배우가 이 사연에 대해서는 꼭 할 말이 있다며 나섰다.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떨어져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공연을 보고 힘을 얻었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그는 20대 초반 시절의 모습을 떠올렸다.
"저도 19~21살 무렵에 아르바이트를 진짜 많이 해봤거든요. 재수를 해야 해서 학원비를 마련하려면 돈을 벌어야 했는데, 대학에 이어 아르바이트까지 떨어지니까 진짜 힘들었어요. 나 자신이 하찮게 보이더라고요. 친구들은 다 입시에서 잘 붙고, 좋은 대학에 가는데 '나는 이쪽 길이 아니구나. 나는 배우로서 쓸모가 없는 애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찰나에 아르바이트를 넣는 것마다 떨어지는 거예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떨어지고, 옷 가게 아르바이트도 떨어지고, 아르바이트도 못하는 거예요.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거의 3개월 동안 못 구했어요. 그때 진짜 힘들었어요. 아르바이트를 떨어진 게 생각보다 타격이 컸어요. 그것 때문에 자존감이 엄청 떨어졌어요. 그런데 지나고 나니까, 지금은 지나고 나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사실은 별거 아니거든요. 아르바이트는 거의 운이라고 봐도 돼요.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거나 '도대체 나는 뭘까' 라는 생각은 안 하셨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어요. 혹시나 그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이어 사람들은 너도나도 실시간 댓글 창을 통해 '저도 아르바이트 떨어졌어요', '요즘 구직이 참 쉽지 않네요', '큰 위로가 됐어요' 등등의 속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중에는 당연히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상 밖에 꺼내 놓은 적 없었던 그의 남모를 실패담과 이제는 당당히 실력을 인정받고 끊임없이 무대에 서는 그의 현재 모습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진심이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사람들에게 가닿아 제각각의 용기로 피어났다. 어쩌면 그냥 지나쳐버렸을 지도 모르는, 대화의 흐름상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었을 이야기를 애써 짚고 넘어가는 그의 훈훈한 마음씨에 덕구는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아야만 했다. 아이고 덕구 살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선수들을 참 많이 부러워했다. 사실 선수들은 개개인이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그래서 팀이 승리하고 우승을 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려면 결국 내가 나에게 주어진 몫을 제대로 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그들에게도 내가 알지 못할 고충이 수없이 많겠지만, 나는 내가 오로지 나의 일을 잘 하는 것 자체만으로 다른 누군가를 기쁘게 만드는 선수들의 매일이 정말 근사하다고 느꼈다. 때로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팬들에게 존재만으로도 벅찬 행복을 줄 수 있으니까. 그 이면에는 피나는 노력과 눈부신 성공 스토리가 뒷받침되어야겠지만 아직 세상의 단면 밖에 보지 못하는 어린 나는 그들의 빛나는 존재감이 늘 부러울 뿐이다.
나는 주변인들에게 힘이 되는 존재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그 질투심은 더욱 커진다.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상대 앞에서 나는 대개 조바심을 내며 덩달아 발을 동동거리는 까닭이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며 애쓰는 내게 누군가는 "조언해 줄 필요 없어. 그냥 내 감정이 이렇다는 거야. 넌 그냥 내 옆에서 항상 그렇게 웃어주기만 하면 된다"는 연애 소설에 나올 법한 이야기도 했더랬다. 나이를 먹으면서 제법 여유 있는 척 행동하는 스킬은 조금씩 늘어가고 있지만, 성격 급한 나는 아직도 마음만 앞서는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럼에도 어떤 방법으로든 상대의 하루를 환하게 밝혀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평생의 꿈이다.
아무래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덕질을 꾸준히, 때론 더 열정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친다. 결국 내가 긍정적인 에너지를 한가득 품고 있어야 주위 사람들에게도 적게나마 좋은 영향을 나눠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시답잖은 핑계를 대본다. 오늘도 이렇게 얼렁뚱땅 덕질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한 가지 더 찾았다.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