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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 Dec 30. 2020

괜찮아, 마음껏 울어도 돼


어느 화창한 오후였다. 하늘은 푸르렀고, 10월의 따스한 햇살 아래서 나도 모르게 기분이 한껏 들떴다. 그날의 나에게는 약 한 달 전의 내가 선물해준 킹키부츠 공연 티켓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힙'한 롤라 언니(?)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가장 아끼는 구두를 꺼내 신었고, 최대한으로 멋을 부렸다. 아주 제대로 한바탕 즐기고 오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누구도 나를 말릴 수 없지! 


 공연장에 들어서자 마자 남다른 열기가 느껴졌다. 보통 1막의 시작을 앞두고는 안내원이 큰 목소리로 근처의 관객들에게 주의사항을 일러준다. 좌석에 바짝 등을 기대어 앉으라거나, 전화기의 전원은 미리 꺼 달라는 당부다. 대개 사람들은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안내 사항을 듣는둥 마는둥 하는데, 우리의 자랑스러운 킹키인들은 리액션부터가 색달랐다. 각 층에서 안내원의 멘트가 끝날 때마다 뜨거운 박수가 쏟아져 나오는 것 아닌가. 사람들은 그 생경한 순간을 만끽하며 꽤 즐거워 보였고, 역시 놀 줄 아는 사람들이 모였다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났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화려한 무대가 이어졌다. 롤라 언니의 위트 넘치는 대사들 하며 아름다운 엔젤들의 고혹적인 움직임, 절로 흥을 돋우는 감각적인 넘버들까지. 좀처럼 입을 다물 수가 없었고, 눈과 귀가 잔뜩 호강했다. 깔깔대며 웃고 온 마음을 다해 박수를 치면서 답답했던 마음도 조금씩 잊혀졌다. 이대로라면 오늘 하루가 정말 기분 좋은 연휴로 기억될 것 같았다. 그런데 엔딩에서 난데없이 위기가 찾아왔다. 화려한 조명과 함께 롤라가 패션쇼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미처 참을 새도 없이 눈물이 터져버렸다.



꿈을 따라 자 날아올라

네 열정에 불을 붙여봐

삶의 축제 날개를 펴네

가끔 넘어질 땐 내 손을 꼭 잡아

네가 힘들 때 곁에 있을게

삶이 지칠 때 힘이 돼줄게

인생 꼬일 때 항상 네 곁에 함께

함께해



 그리고 이어지는 대망의 하이라이트 넘버. 'Raise you up'은 가사처럼 내 마음에 정말로 불을 붙였다. 롤라의 솔로로 시작해 무대 위 모든 배우들이 함께 떼창을 부르는 이 넘버는 듣는 순간 가슴속에선 무한한 긍정의 기운이 샘솟는다. 세상의 편견에 당당히 맞선 롤라와 그를 친구로 받아들여준 킹키부츠의 모든 캐릭터들이 정말로 내가 힘들 때면 뿅 하고 나타나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줄 것만 같은 환상에 빠져든다. 이 순간 무대 위의 모든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활짝 웃으며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킹키부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율동을 신나게 추면서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반대편에 앉아 있는 내가 마치 사연 있는 사람처럼 서글프게 울어버리고 말았다.


 '혼자' 이 험한 세상을 헤쳐가야한다는 사실은 나를 자주 막막하게 만들었다. 회사에서 맡은 일을 완벽하게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자책감에 짓눌려 몇날밤을 괴로워했다. 친구들은 늘 손에 닿지 않을 만큼 저 멀리 달아나서 행복하게 저마다의 삶을 누리는 것 같아 보였고, 이곳에 홀로 남겨진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내 삶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가야할 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두려웠다. 이 때 킹키부츠가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나를 다정하게 일으켜세워줬다. 


 롤라와 엔젤들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함께 해주겠다'고들 약속을 하니, 나는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실 주위 사람들에게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으면 자주 듣게되는 이야기였다. '힘들 때 언제든 연락해. 나는 네 편이야. 너는 잘 해낼거야.' 하지만 결국 모든 상황에서 마땅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건 나 자신이었다. 그런데 킹키부츠의 롤라는 그 돌파구를 시원하게 뚫어버리는 과정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줬다. 나는 그가 했던 것처럼 잠시 잃어버린 용기를 내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롤라의 존재는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었던 내 인생의 가장 큰 위로였다. 


 공연장을 나와보니 여전히 맑고 화사한 날씨가 나를 반겼다. 대낮부터 정신없이 울어버린 내가 조금 민망해졌지만, 왠지 기분이 상쾌했다. 


 -


 사실 어린 시절 부터 툭하면 눈물을 쏟았다. 한창 부모님과 맞설 일이 많았던 청소년기에는 뭐가 그리 억울한 일이 많았는지. 따박따박 대들다가도 혼자서 울컥하는 날이 많았다. 머리와 몸이 자주 따로 움직였다. 나름대로 논리적인 반박을 좀 펼쳐보려고 하면 이성보다 감정이 늘 앞서 표현됐다.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껴 울다 보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부모님은 이런 나를 가엽다는 듯이 달래줬고, 언제나 당신이 잘못했다며 상황을 매듭짓곤 했다. 그럴 때면 늘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마치 눈물이 무기라는 듯 동정심을 유발해 부모님의 사과를 받아낸 기분이었다. 나의 반항은 늘 설득력이 없었다.  


 사회인이 된 후로는 서러운 날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어찌보면 당연했다. 첫 단추부터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경쟁을 간신히 뚫고 원하던 직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1지망 부서에 배치되지 못했고, 동기에게 밀려났다는 생각에 울적해졌다. 낯선 업무를 배우고 익히느라 사수에게는 매일같이 혼이 났다. 연차가 쌓이면서는 상사에게서 말도 안되는 지시를 받는 경우가 차츰 늘었다. 회사가 나만의 색깔을 존중해주지 않고, 나의 가치를 알아봐주지 않아 답답했다. 그럴 때마다 매일같이 비상구 계단으로 뛰쳐나가서 펑펑 울었다. 마음이 좀 진정되면 청계천으로 나가 잠시 걸으며 눈물 자국을 지웠다.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는 꼭 화장실에 들러 눈이 붓지는 않았는지, 얼굴이 아직 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아닌지 꼭 최종점검을 했다.


 하지만 선배들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평소와 달리 어두운 표정, 축 처진 어깨가 눈치없이 얄미운 고자질을 해댔다. '얘 지금 밖에서 울다가 들어왔대요!' 그럴 때마다 사수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병주고 약주는 건가 지금? 아주 잠시동안만 다정한 손길 아래서 나는 항상 스스로에게 잔뜩 화가 났다. 늘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왜 허무맹랑한 지시에는 한 마디 대꾸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부당한 일을 당했으면서도 야무지게 내 의견을 말 할 용기조차 내지 못했는지. 왜 매번 눈물로 답답한 감정을 해소하려 하는 건지. 변함없이 나약한 내가 부끄러웠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눈물을 터트릴 수 있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 앞에서는 혹여나 걱정을 끼칠까 어떤 내색도 하지 못했다. 회사에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참고 참다 털어놓으면 돌아오는 이야기는 같았다. '어차피 다른 회사도 다 똑같아. 돈 버는게 어디 쉽니.' 언젠가부터는 이런 말들이 듣기 싫어서 부모님 앞에서 매일같이 괜찮은 척을 했다. 친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신세를 한탄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그마저도 내키지 않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들도 나와 다름 없이 힘겨운 하루를 살아나가고 있을텐데, 괜히 기운 빠지고 우울한 이야기를 건네고 싶지 않았다. 


 어디에서든 울고 싶은 이유야 많았지만, 어디에서도 마음 놓고 울 수 없었다. 


-


 그런데 킹키부츠를 보며 펑펑 울던 날 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자유로웠다. 내가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설명이 더욱 적절할 정도다. 우리는 모두 무대 위의 움직임을 눈에 담기에 정신이 없었고, 그렇게 우리는 같은 방향 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옆 자리 사람이 어떻든 관심을 줄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나의 눈물을 가려줄 적당한 어둠이 있었고, 어쩌면 그들도 나처럼 눈물을 한방울 쯤 훔쳤을지 모르겠다. 


 공연장에서 운다는 행위는 가엽거나, 안쓰럽게 여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나도 스스로를 나약하다고 자책하거나, 남들의 시선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나는 뮤지컬을 보면서 때로는 감동을 받아 눈물을 쏟기도 하는 아주 감수성 풍부한 사람'이라는 일말의 자랑스러움까지 느껴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마음이 후련했다. 


 이후로도 나는 계속해서 적당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친절하게도 무대 위에는 꼭 내가 울 수 밖에 없었던 장면들이 하나정도씩은 숨겨져 있었다. 하루는 주인공의 위로가 따뜻해서, 천장의 조명이 밤하늘의 별처럼 예쁘게 쏟아져서, 주인공의 시련이 안타까워서 나는 툭하면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감정들을 내 자리에 단단히 묻어놓고 나오면 모든게 괜찮아졌다. 다시 공연장 밖의 내 현실을 씩씩하게 살아갈 힘이 채워졌다.


 나를 기다려주는 넉넉한 품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그 존재만으로도 내 세상은 단단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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