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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꽃 Feb 06. 2021

우리는 자신에게 함부로 명령을 내릴 수 없다.

나도 나에게 반항할 수 있다.


지난가을, 헬스장에서 개인 피티를 받았다. 20회에 3개월 헬스장 정기회원권까지 포함해 꽤나 큰 지출을 감행했다. 당시에 이유도 모르게 갑자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었고, 아마도 근육이 없어서 신체 균형이 무너진 것일 거라 주변에서 조언을 해주었다. 깊게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피티 수업을 결제했다. 


별나게도 피티 수업을 시작하고 얼마 뒤 허리 통증은 또 이유도 없이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근육이 없어 아팠던 건 아니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시작했던 헬스 개인 트레이닝에서 오로지 기억에 남는 건, 

식단이었다.


처음 목표는 증발됐지만, 체중감량에 무게를 두기로 했기에 꽤 철저한 식단 조절을 감행했다. 다이어트에서 식단 관리는 8할이나 다름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실천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장장 3개월 정도를 생전 처음 보는 식재료와 레시피로 씨름하며 보냈다. 통밀 식빵이나 현미밥, 양상추 샐러드 같은 건강식을 주식으로 먹는 건 상상보다 더 까다로웠다. 아마도 문제의 시작이 여기부터였으리라 생각이 든다. 


샐러드를 먹더라도 통밀 스파게티면을 같이 삶아서 올리브유, 후추, 소금을 곁들여 통밀 샐러드 파스타를 해 먹거나, 고구마와 치즈를 계란과 함께 익혀서 고구마 에그 슬럿을 먹었다. 


나름 미각도 즐겁고 보기 좋게 플레이팅을 하는 것에도 재미를 붙이며 열정적으로 식단을 실천했다. 

한참 그렇게 관리에 열중하던 2달 즈음, 달콤한 케이크와 빵을 폭식했다. 그것도 야심한 밤에 혼자, 편의점에 달려가서 왕창 사 가져와서 먹었다. 이상한 것은 분명 내 입으로 먹는데 내가 먹는 기분이 아니었다. 먹는 행위 자체에 가속도를 쉼도 없이 붙여서 마구 달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후에도 몇 번이고 같은 실수를 번복했고 번아웃이 됐다. 시한폭탄 터지는 듯한 폭식이 두려워서 칼로리를 재고 '탄단지'를 꼼꼼하게 계산하는 과도한 노력을 내려놓았다. 


 유튜브나 다양한 매체에서 '퍼스널 브랜딩'을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일생일대의 인생 사진, 바디 프로필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전 같았으면 남일이라고 생각했을 유튜브 바디 프로필 브이로그인데, 한동안 험난한 과정을 겪고 나니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슬림하지만 근육이 탄탄하게 잡힌 한 컷의 사진 이면엔 기나긴 사투와 여정이 서려있다는 것도 체감한다. 쉬고 싶어도 헬스장에 가서 웨이트를 하고 치킨 대신 닭가슴살을 잡는 루틴을 반복하면서 이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혼자 생각하곤 한다. 


영화 <라이프오브파이>



  비단 다이어트뿐만 아니라도 어떤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나갈 때, 예외 없이 내면 안엔 전쟁이 시작되곤 했다. 마음 안의 파시스트와 보헤미안이 쉬지도 않고 뜨거운 공방을 벌인다. 파시스트는 이성이다. 보헤미안은 감정이자 본능이다. 단편적인 정의이이긴하지만, 내겐 그랬다.  파시스트는 목표라는 몽둥이로 보헤미안을 짓누르지만 이겨도 이긴 게 아니었다.  지는 것 같아 보여도 내 안의 보헤미안은 '한방'을 노렸다. 보헤미안은 수만 년 전부터 신체가 축적해온 '본능에의 욕망'이어서 노련미가 가득하다.



내가 나에게 반항하는 이 모순에 대해 책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선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강요하는 전체주의에도 반발하지만, 우리 자신의 전체주의에도 저항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함부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니다. '내일부터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어'라고 굳게 결심해도 다음 날 여전히 빈둥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늘은 조금만 먹겠어'라고 아무리 다짐해도 폭식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성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천성이 있다. 우리는 그 천성을 찾아내고, 그 천성과 한바탕 씨름을 벌여야 한다. 그런 후에야 자신과 타협할 수 있다.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 역시 사람이 한 방향으로 자신을 내몰고 가면서 혼돈에 빠지는 자세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각자의 가치관을 개발할 수 없다. 내가 믿는 것이라고 해서 영혼이 무작정 받아들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


나의 영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인가? 


  <12가지 인생의 법칙>의 저자 조던 피터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성과 씨름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거다. 그리고 그저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마무리는 항상 신사적인 '타협'이었어야 했었다.


"넌 그렇게 생각해? 근데 내 경우엔.."-이런 타협을 통해서 말이다. 


내면과 소통하고 몸의 반응을 관찰하며 원하는 목표를 위해 일보 전진하는 자세가 부족했었다. 내 안의 파시스트는 온전한 내편이고 무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었음을 3개월의 여정 동안 실감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값진 것은 자연스러움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건 정성이 필요하다. 물론 '억지로 노력하는 자세'는 빠른 방법이지만, 부자연스러움은 반드시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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