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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memike Oct 08. 2021

울타리 속 사회, 학교

여든일곱번째 이야기


나는 부모님의 직장을 따라 초등학교만 세 군데를 다녔다. 두 번의 전학, 그리고 세 개의 학교. 이는 일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일어났다. 자세하지는 않지만 두번째 학교부터는 어렴풋이 기억이 남아있다. 신도시 맞벌이 가정, 아침은 늘 시리얼이었다. 부모의 이른 출근길에 맞춰 그 자녀는 늘 등교 시간이 빨랐다. 학교는 언덕 위에 있었고, 혹시나 지각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경사진 등교길이 너무나도 미웠다. 1학년의 어린 나이였고, 학교와 친구에 대한 기억 대신 경사진 학교 입구가 생각나는 걸 보면 반복된 일상이 몸에 기억으로 남은 것 같다. 학교가 끝나면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뽑기를 먹으러 갔다. 학교 근처 아파트 상가에는 오백원을 넣으면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는 뽑기 기계가 있었다. 수중에 있는 돈이 이삼천원뿐이었지만 오백원의 행복은 상당했다.   



세번째 학교는 집에서 가까워서 걸어다녔다. 근처 친구 집의 초인종을 누르면 늘 친구 엄마가 문을 열어주었다. 친구네 집에서 십분 정도 과일도 먹고 얘기도 하면 어느새 등교 시간이 가까워졌다. 친구랑 실내화 가방을 걷어 차며 단지 내 오솔길을 지나 학교에 갔다. 이 학교에서는 육상을 배워서 다른 친구들보다 한시간 일찍 학교에 가서 체육 선생님과 단둘이 연습을 했던 것도 기억난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학교가 끝나면 축구를 하는 친구들도 늘었다. 방과후학교로 플룻을 배웠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자마자 축구를 못하는 게 서러웠다. 그리고 여전히 문방구 옆 분식집에서 파는 떡꼬치와 피카츄가 맛있었다. 돌이켜보면 학교에서 뭘 배웠는지 보다 친구랑 다니던 등교길, 매일 아침 파스 붙여 가며 연습한 높이뛰기, 학교 근처 불량식품이 더 기억에 남는다.


학교는 울타리 속 사회다.


흔히들 학교를 ‘작은 사회’라고 한다. 가족 구성원이 아닌 사회의 구성원을 만나 관계를 만드는 곳이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특히 초등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는 인생의 첫번째 친구이며,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인생의 첫번째 스승일 가능성이 높다. 학교는 관계와 배움이 시작되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를 일반 사회와 구분하여 ‘작은’ 사회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학교는 ‘울타리 속 사회’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할 수 있다. 일반 사회와 달리 학생들은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보호를 받는다. 친구끼리 싸우면 화해의 기회를 만들어주고, 실수를 하면 ‘아직은 어리니까’라는 위로와 응원을 해준다. 학교는 어쩌면 이 시대에 유일하게 실패해도 용인이 되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학교는 성장보다 성적을, 협동보다 경쟁을 종용 받는다. 학생들은 무언가를 배우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채 배움에 쫓기고 있다.



학교는 시대의 가치관을 담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교련 수업, 나라가 성장해야 할 시기에는 학력 고사, 다재다능한 인물을 원하는 지금은 통합형 수업이 교육의 중심에 있다. 변화의 시대 속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지혜와 원칙이 있다면 어떠한 상황이 와도 유연한 대처가 가능하다. 학교에서 배워야할 것은 소통능력, 갈등 및 문제해결능력, 자기표현력이다. 학생들은 실패가 용인될 때 그 특권을 충분히 누려야 한다. 시도하고, 실험하고, 실패해야 한다. 이를 통해 배우는 회복력이 이 사회를 헤쳐 나갈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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