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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색빛 Sep 18. 2020

04. 나도 날 모르는데, 네가 나를?

번외) 단정 지어버리는 것에 대한 위험


#4




“넌 원래 그런 애잖아.”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런 애가 되어 있었다.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나의 생각과 의견과는 상관없다는 듯.





나도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상대 눈치를 보고 더 좋은 사람으로 비치려 무던히도 애썼다.

나에게 맞지 않는 것들을 걸치며 '이게 나야.'라며 최면을 걸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아닌, 남에게 더 잘 보이고 싶었고 그 방법에 집중했다.

나의 직업도 마찬가지.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일지 고민하기 전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랑 문제없이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에 집중했다.

그럴수록 내가 원하는 것들은 멀어져 갔고 나의 정체성 또한 흐려졌다.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이렇게 월급쟁이가 되어가는 거구나 생각이 들고,

이럴 거면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슬럼프에 굉장히 크게 빠졌다.

어차피 반복되는 일을 할 거라면 다른 직장에선 어떤 루틴으로 돌아가는지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과 더 나이 들면 이제 구직이 어려워질 거라는 불안감이 함께 엄습해왔다.


'네가 원하던 바리스타의 삶이 이런 거야? 확실해?'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내가 생각했던 바리스타는 뭐지? 나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었지? 나는 여기서 왜 일하고 있는 거지?


수많은 생각들이 뒤섞인 채 2019년의 초겨울을 보내는 중이었다.




블루보틀 삼청 한옥

그러던 찰나, 방문하게 된 어느 카페.

그들은 본인들이 서있는 공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자신감이 넘쳤다.

음료와 디저트를 페어링 하여 판매하는 곳. (자본의 힘 또한 대단했지)


음료와 디쉬를 대접받으며 잊고 있던, 또는 잃어버리고 있던 것들이 하나둘 몰려왔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벅찬 감정과 생각들은 그날 하루 종일 편두통으로 나를 괴롭히기 바빴다.


커피로 누군가와 소통하는 것.

커피의 형태를 바꾸고 맛과 향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그 갈증이 이렇게나 컸다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빠르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다시 해야겠다.'


커피를 즐기지 않는 누군가에게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과

커피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커피를 즐기는 방법이 다양함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까지.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


오마카세 커피 바.

*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추후 풀어나갈 예정이다.


남들이 나에게 원하고 바라는 게 아닌, 나 자신이 나에게 원하고 바라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에게 커피가 무엇이고 바리스타라는 직업은 무엇인지 묻고 또 물으며 2019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너는 원래 그런 애잖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그게 내 전부일까? 라며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나도 나를 아직 다 모르는데 어떻게 나를 다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냐고 되려 묻는 내가 될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하고 싶은 것들은 해야 하기 때문에 하기 위한 방법을 수없이 고민하는.

남을 배려하느라 내가 하고 싶은걸 선뜻 말하지 못하는.


그러나,

하고자 하는 마음과 생각만 확고하다면 언제든 먼저 말을 건넬 수 있는 용기가 있는.


누군가 "너는 원래 그렇잖아."라고 말한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꼭 생각해보면 좋겠다.

정말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인지, 나는 다르지만 상대를 배려해서 그간 참고 또 참아온 건 아닌지.

그 사이에 나 자신을 잃어가는 게 아닌지.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나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나를 기록하고 남기고자 종이와 펜이 아닌, 모니터와 키보드를 꺼내 들었다.



2030년의 내가 2020년의 나를 보며 '그래, 잘했다.'라고 손뼉 쳐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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