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면서 시댁 따라 이동했던 낯선 강원도에서의 생활은 여러 가지로 힘들었다. 어른들은 섭섭해하셨지만 남편과 나는 원래 살던 도시로 다시 나오는 것을 결정했다.
새롭게 다시 신혼이 시작되는 것처럼 설레었던 분가.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도 시작하게 되었다.
워킹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내 딸은 18개월부터 집에서 홈스쿨을 했었고 어린이집도 즐겁게 다니는 아이였다. 적응력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사회성이 좋다고 해야 할지, 선생님을 잘 따르고 새로운 규칙을 잘 받아들였고 무언가를 새로 배우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선생님들 말씀에 따르면 집중력 좋고 배움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아주 바람직한 아이. 그래서 내가 분가 후 일을 하게 되며 급하게 구한 어린이집에서도 문제없이 적응할 거라 생각했었다.
처음엔 내 생각처럼, 지금까지 봐왔던 것처럼 잘 적응했고 잘 다녔다. 7시 40분쯤 어린이집에 맡기고 5시에 퇴근하며 픽업을 했다. 문제는 어느 날인지도 알 수 없게 서서히 찾아왔다.
어린이집을 가기 싫어했다. 남자아이 한 명이 자꾸 못살게 군다 하여 어린이집 선생님과 상담도 여러 번 했었다. 울음이 짧아서 순하디 순하단 말을 듣던 아이가 아침마다 통곡을 했다. 출근 때문에 어르고 달래서 어린이집에 겨우 맡겼다가 퇴근 후 데리러 가면 친구들과 잘 지냈고 밥도 잘 먹었다는 선생님의 상냥한 말과 다르게 아이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어느 날엔 집에서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놀란 내가 붙잡고 끌어안으면 그저 안겨있다가 아무렇지 않게 놀았다.
그런 나날들을 보내던 중,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났다. 친구들이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애가 뭔가 이상하다고. 예전에 봤을 때랑 다르게 표정도 없고 어딘지 우울해 보인다고. 나 스스로도 어렴풋 느끼던 것을 친구들도 느낀다는 것에 놀랐다. 아무래도 어린이집이 문제인 것 같아서 다른 어린이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주말에 놀러 온 시어머니도 친구들과 같은 말을 하며 상담이라도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니니하며 여쭈셨다. 점차 우리 부부 사이에도 싸움이 늘어갔다.
난 그때까지도 이게 그렇게 큰 문제를 불러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어린이집을 옮기면 해결될 문제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당시에 다니던 어린이집은 등 하원 시에 봐도 썩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많았으니까.
그렇게 다사다난하게 1년을 보냈다. 여전히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하고 어딘지 우울해 보이지만 집에서 나와 있을 때면 애교도 많고 잘 웃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어느 날 아이가 눈을 자꾸 비비며 깜빡이기 시작했다. 요즘 결막염이 유행이라더니 어린이집에서 옮아왔나 생각하며 안과에 데려갔다. 그날, 집에 와서 잠든 아이를 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단순 눈병일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다르게 의사가 내린 진단은 [틱 장애]였다. 스트레스 성 틱 장애. 한마디로 마음의 병이었다. 약도 없고 그저 아이에게 스트레스 주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라 하셨다.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1년의 시간 동안 아이는 내게 끊임없이 행동으로 말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나는 알아보지 못했던 거다. 아니, 몇 년 만에 다시 시작한 사회생활이 즐거워서 아이의 마음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기적인 내 마음이 아이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급하게 남편과 함께 지인이 운영하는 유치원에 찾아가 사정하며 부탁한 끝에 드디어 다니던 어린이집을 나와 이원을 시켰다. 새로이 유치원으로 옮기며 아이의 우울감이 점차 나아지는 듯했다. 아침마다 벌어지던 등원 전쟁이 사라졌고 아이의 표정도 점차 밝아졌다. 그러나 틱은 사라지지 않고 아이가 피곤하거나 긴장하는 등 아이의 컨디션이 안 좋을 때면 여지없이 등장했다.
결국, 나는 이듬해에 퇴사를 했다. 아이는 점차 나아지고 있었지만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곁에서 더 챙겨주고 싶었다. 퇴사를 하며 남편의 의견대로 아이를 위해 강아지를 입양했고 마음을 표현하고 위로할 수 있도록 바이올린과 미술 수업도 새로이 시작했다. 아이의 말엔 최선을 다해 귀를 기울이도록 노력했고 우리 부부도 아이 앞에선 싸우지 않고 언성도 높이지 않도록 합의했다. 유치원과 학원 선생님들께도 아이의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고 부탁드렸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더니, 우리 부부가 딱 그 짝이었다.
아이보다도 개인의 삶에 집중한 결과였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어느 시의 한 구절처럼 아이는 그렇게 연약했다.
틱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여지없이 등장해 지켜보는 나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준다. 내가 그 모습을 보며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남편은 자라면서 사라질 거라고 다독여주지만 솔직히 걱정이 사라지진 않는다. 어린 나이에 생긴 틱은 보통 사춘기 무렵이면 사라진다고 하지만 평생 가는 경우도 있다 하니 어찌 걱정이 안 될까. 그래도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많이 나아졌다. 평소엔 전혀 틱이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아이의 틱을 떠올리면 난 아직도 미안하고 후회스럽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쩌랴. 벌써 11살이 된 내 아기는 더 어렸던 그 당시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 "미안해,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몰랐어." 이렇게 장난스레 툭 던지면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짓궂게 웃는다.
그래, 건강이 최고지. 몸도, 마음도 건강한 게 최고야. 엄마가 잠깐 바보 같았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좀 괜찮은 엄마이지 않니? 이렇게 물으면 또 왜 저러냐며 웃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