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돌아 올 생일주간을 대비해 미역국을 한 솥 끓였다. 푹 퍼져가는 미역을 보며 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끌 때의 멋쩍음을 생각한다. 늘어나는 초의 개수만큼의어른으로 자라지 못한 탓일까. 축하를 받는 일에 무감각해진 탓일까. 내년 생일이 지나면 만 나이마저도 앞자리 숫자가 바뀐다. 근근이 붙들고 있던 30대의 마지막이 턱밑까지 다가왔다. 계절도, 어제도 눈뜨기 무섭게 ‘순삭’되는 날들. 오늘이 멀어지는 소리가 갈수록 선명하게 들린다.
어딜 가도 별다른 감흥이 없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적정량 이상 들어가면 속이 거북하다. 불같이 화를 내는 일도, 깔깔거리며 숨이 넘어가도록 웃는 일도 줄었다. 전에 없던 절제와 평온이 생긴 것으로 보아 난 늙어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언니들은 그냥 귀엽게 봐주길)
잔잔한 일상이 지루하지 않고, 무언가에 심하게 흔들리는 일이 줄어든 건 나이가 든 탓도 있지만, 두 아이를 먹이는 일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한다. 때는 십여 년 전, 모유만 먹던 첫째는 돌이 지나도록 젖병과 빨대를 거부했다. 이유식을 먹을 무렵에도 씹고 삼키는 걸 즐기지 않았다. 몇 올 없는 머리카락이 젖도록 기어 다니며 수시로 보채고 울었다. 목이 마를 때도, 허기질 때도, 잠이 올 때도 내 젖을 찾았다. 생존을 위해 떨어질 수 없는 사이로 그렇게 1년 반을 보냈다.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던 아이에게 뽀로로가 나타났다. 턱받이를 한 채로 뽀로로 한입 나한입 하며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고, 물병에 담긴 보리차를 쪽쪽 빨아 마셨다. 먹이는 일에 자유로워졌을 무렵, 둘째가 찾아왔다. 첫째의 낮고 작은 어깨를 감싼 채 난 다시 둘째에게 젖을 물렸다. 새벽마다 첫째의 등을 토닥이며, 젖병에 분유를 태웠다. 두 아이를 번갈아 재우고, 배불리 먹이는 노동은 낮과 밤이 없었고, 매일 밤 외로이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낯선 일이 필요이상으로 중요해지면, 삶은 뒤틀리기 마련이다. 이름 모를 사명감이, 어설픈 모성애가 한쪽으로 기운 사람으로 살게 했다. 중요한 일을 한다는 핑계로 덜 중요한 것들을 챙기지 않았다. 내 마음은 각박했고, 행동은 여유가 없었다. 아이가 자라는 속도만큼 자라지 못한 어른으로 사는 사이, 첫째는 혼자서 가스 불을 켜고 껐다. 어쩌다 성공한 계란 프라이를 기점으로, 자연스레 라면과 자장면을 끓여 먹는 어린이가 되었다.
열두 살이 된 아이는 아홉 살 어린이의 끼니도 책임졌다.
열세살 아들의 요리는 진화중
그들의 끼니와 안전을 부탁할 누군가를 찾지 않아도 되자, 집을 나설 때마다 드는 작고 불편한 마음이 점차 가벼워졌다. 전부라고 생각한 일에 힘을 빼기 시작하니, 그간 덜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이 떠올랐다. 알고 보니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데, 놓치고 있던 일. 이를테면 나를 위한 상을 차리고, 걷고, 운동하며, 읽고, 쓰는 일과 같은 놓치면 안 될 것들을 하나씩 찾아 나섰다.
해지고 낡아 보여주기 부끄러웠던 속옷을 버렸다. 치과 스케일링을 예약하고, 읽고 싶은 소설을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오래도록 응원을 주고받는 사람들에게 먼저 안부를 물었다. 마음의 빚을 진 사람들에게 기프티콘을 보내고, 남편에게 이유 없이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건넸다.
끼니를 챙기는 일에 자유로워졌지만, 끼니의 만들 재료를 사서 채워 넣는 일은 아직 내 몫이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환한 조명이 쏟아지면, 내 머리도 덩달아 하얘진다. 특히 자투리 채소나 고기가 턱없이 부족할 때면, 온갖 창의력을 동원해 요리를 한다. 묵은지를 씻어 넣은 파스타라든지, 양배추와 소고기만 넣은 된장국이라든지, 익숙하고도 낯선 요리를 거침없이 내놓는다.
늘 갸우뚱하면서 맛있게 먹어주는 이들 덕분에 요리에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이는 되도록이면 배달 음식을 먹이지 말자는 신념을 지키는 데도 일조했다. 열 살 어린이가 먹는 양 대비 균형 잡힌 몸매를 유지하는 비결도 아마 이 때문일 테다. 느끼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지 못하는 아들의 입맛을 확인할 때마다 내심 뿌듯하다. 건강한 입맛으로 남은 생을 살아갈 것만 같아서. 타인의 일생에 이바지하고 있는 내가 때론 놀라워서.
신선한 계란 한 판을 반값으로 사기 위해, 이천 원으로 오이 세 개를 사기 위해 마트 오픈런을 마다하지 않는다. 신선한 육류와 채소, 제철 과일, 급할 때 데워먹을 가공식품으로 고루 채운 냉장고를 볼 때마다, 앞으로 차리고 치울 수많은 끼니를 생각한다. 그리고 점점 늙어갈 나를, 점점 자라날 아이들을 떠올린다.
마트행사 오픈 런 성공
내가 차린 밥이 이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머물길. 그 기억들이 가장 중요한 일을 놓치지 않는 힘이 되어주길. 뒤틀린 삶을 바로 잡아주길 바라며 걸쭉한 미역국을 한 국자 맛본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매거진 <살림 생활자의 글쓰기 생활>은 글 쓰는 주부의 살림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작가들의 살림, 작가들이 살린, 작가들을 살린 이야기를 브런치에서 만난 다섯 명의 작가가 모여 쓰고 있습니다. @단미 @Jina가다@치유의 하루@미칼라책방 작가님들의 매거진도 방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