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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소풍 이정희 May 17. 2024

여름1, 페리토 모레노 빙하-아르헨티나

백 만년의 빙하 길에서 찾은 나의 색

 볼리비아에서 출발하여 칠레와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까지 길은 무척 길다. 길게 뻗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과 초원에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는 지루한 길이다.


 버스 안에서 누워 음악을 듣다, 책을 읽다가 여행을 나선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이렇게 장거리 버스를 타는 시간은 지루한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곳을 가기 위한 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예상은 했지만, 집 떠나 15일째 몸은 피곤하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이런 시간은 버스 안의 낯선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모습과 차창 너머 풍광에 집중할 수 있어 즐겁다. 오랫동안 확인하고 싶었던 모레노 빙하의 마법적인 풍광에 대한 놀라워할 내 모습이 떠오르며 흥분이 된다.


 처음으로 거대한 빙하를 걸으며 보고, 듣고, 느낄 것들이 많은 것 같아 기다려진다. 행복은 소유나 인정이 아니라 이렇게 스스로 선택하여 이루어가는 과정의 감정들 같다.     


 남아메리카 대륙 맨 끝 아르헨티나 최 남쪽 남극과 가까운 파타고니아 대륙에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이 있다. 이곳은 오래된 너도밤나무 숲과 안데스산맥의 뾰족뾰족한 봉우리에 둘러싸인 곳에 있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가 매우 유명한 곳이다.      


 우선 크기가 엄청나서 한반도의 5배 정도이다. 그곳의 빙하들이 조금씩 녹으면서 갈라져 떨어져 나갈 때 하늘을 울리는 천둥소리가 난다. 그 장엄한 자연의 소리 때문에 더더욱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시퍼런 백 만년 빙하들이 제 살덩이 떼어 내며 비명을 지르며 쪽빛 호수에 물보라를 일으킨다.

 세상을 깨우는 소리에 사람들의 흥분과 감회로 넘치고 있었다. 모두 빙하에 빠져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백만 년의 빙하가 쪼개져 얼음덩어리가 되어 눈앞에서 녹아버리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렇게 제 원래 모습이었던 물이 되어갔다. 모두 자연의 경이로움에 놀라며 지구의 환경을 걱정하고 부지런히 남 탓을 했다.    

  

 현지에서는 여러 가지 빙하 투어가 이루어지고 있다.

 빙하 구역 외곽을 돌아보고 가까이서 빙하를 관찰할 수 있는 크루즈 투어, 빙하를 포함한 국립공원 전체를 전망하는 버스 투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이젠을 끼고 직접 빙하 위를 걸어보는 트레킹 투어였다.

 처음으로 빙하얼음을 가까이서 보고 그 위를 걸어보는 것이라 긴장되기도 하고 설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음의 세상 겨울 왕국이다.’     


 빙하 위를 걷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이정표도 없을뿐더러 바닥이 고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앞사람의 뒤를 따라 중심을 유지하면서 조용히 걷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만큼은 내가 밟는 바닥을 유심히 집중하여 보면서 매 순간을 걸었다.


 이제 시작이라는 듯이 바람은 뭐든 날려 버릴 기세로 덤벼들었다. 바람에 버티기 위해 몸을 최대한 웅크려 작게 만들었다. 나는 점점 작아졌지만 단단해졌고 바람이 무섭지 않았다.


 놀랍게도, 빙하들은 어디선가 봤던 것처럼 하얗지 않았다. 시리도록 파랬다. 그때 처음으로 빙하의 순수한 색깔이 파랗다는 것을 알았다. 빙하에도 원색이 있다는 걸 빙하 길을 걸으며 알았다.


 어쩌면 수만 년 동안 쌓아온 시간의 결정체가 순수한 하얀색일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고정관념 혹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어떤 것이든 세월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면 자신만의 색을 지닌다.

 긴 세월 동안 스스로 갈고닦은 이 빙하에서는 시리도록 푸른색이 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길을 걸으며 나 자신의 색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색을 가지고 있을까?”     


 다만, 바라는 것은 자신의 원색이 인생을 살면서 바래지거나 흐려지지 않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색깔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 트레킹 투어 또한 마찬가지였다.


 트레킹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의 국적이나 그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이 빙하 위에서는 일렬로 줄을 맞추어 길을 함께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수백만 년을 품은 빙하는 어머니처럼 이런 인간들을 품어주는 듯 보였다. 백년도 못사는 인간들이 자기 몸을 밟고 지나가는 것이, 어머니로서는 가소롭지 않겠는가.


 나의 발자국은 바람에 금방 지워지겠지만, 이 빙하는 자신의 원색을 지키며 앞으로도 수만 년을 더 이 자리에 있겠지.

 이러한 대자연의 장엄함이 이 모레노 빙하가 유명한 이유가 아닌가 싶었다.    

 

 안내인은 모두에게 바람 부는 빙하 트레킹을 무사히 해낸 것을 축하하자며 백만 년 빙하의 얼음을 섞은 위스키 언더락을 권했다.

 백만 년의 시간이 차갑고 뜨겁게 입안 가득 스며들었다.


'가끔 지구 반대편 먼 세상,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페리노 모레노 백만 년 빙하와 쪽빛 호수가 꿈에 보인다.


 그러면 나는 나의 색을 지닌 얼굴에 손을 얹으며 그 차가운 현실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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