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생명을 두고 ‘고기’라고 말하면 이상한 느낌이 든다. 살아서 풀 뜯는 소를 두고 소고기라고 하거나 꼬꼬꼬 우는 닭을 두고 닭고기라고 하면 어색하다. 하지만 물고기만은 오히려 살아있는 생명에 고기를 붙이고 죽어 인간의 먹이가 된 것에 ‘생선’이라는 희한한 말을 붙인다. 왜 물고기는 고기일까. 애완동물이라는 말이 반려동물로 바뀐지 20여 년이 다가온다. ‘귀여워하거나 즐긴다’는 뜻이 가족으로 함께 하는 생명체들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며 바뀌었다. 4명 중 한 명은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시대, 여전히 ‘물고기’만은 고기다. 생선이라는 말을 쓰면 나았을까?
수많은 열대어들과의 삶을 살아가면서 내게 물고기는 더 이상 고기가 아니게 됐다. 은밀히 엿보며 느낀 삶 속 개성과 마주친 눈, 나와 그들만이 기억하는 여러 일화는 그들의 비늘이 켜켜이 빛나듯 특별하다. 그러나 세상이 바라보는 나와 그들의 일화는 그저 ‘유난’에 불과하다.
2023년 8월 4일, 오서방으로 부르던 블루 구라미 하나가 세상을 떠났다. 2020년 12월 처음 만난 후 975일만이다. 탁하지 않고 맑은 눈은 여전히 어딘가를 바라보는데, 절대 눕지 않던 녀석이었건만 녀석은 바닥에 누워있었다. 혹시나 기운이 없는걸까 수 분을 들여다 봤지만 아가미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녀석들이 밥을 주나 싶어 내 앞을 서성였지만 오서방만은 꼼짝 않았다. 갑자기 댐 수문이 열린 듯 눈물이 펑펑 흘렀다. 블루 구라미의 수명은 5년, 내게 왔을 때는 청소년. 오서방은 올해 들어 부쩍 나이든 티가 났다. 몸에 좋단 것들을 구해다 먹였지만 끝이 상한 지느러미가 그다지 돌아오지 않았고, 수조 뒤쪽 자기만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 했다. 오서방의 죽음에 하루종일 울어서 밤엔 두통이 심해 잠자기 쉽지 않았다. 눈물이 끊임없이 났다.
내 곁을 떠난 구라미는 하나 더 있었다. 삼봉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구라미는 2022년 내 곁을 떠났다. 두 녀석은 지난 4년간 나를 정말 힘들게 했다. 좀 더 순한 성격과 작은 몸집의 다른 구라미를 원했는데, 수족관의 착각으로 오서방과 삼봉이가 집에 들어왔다. 온 녀석들을 어떻게 내치랴 했지만 하필 성격이 난폭한 종이었던지라 정말 고생을 했다. 둘이서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지느러미에 낫지 않는 흉터가 생기기도 했고 그들의 싸움에 같은 어항 식구들이 꼼짝을 못 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수조를 추가했고 둘을 분리했다.
삼봉이는 테트라히메나라는 원충에 감염돼 떠났다. 우연히 온몸에 얼룩덜룩한 무언가가 보여 건져보니 건강한 모습이 아니었다. 혼자서 일주일쯤 이래저래 처치해 보다가 서울 노원에 있는 수산질병관리원 '물고기병원'까지 갔다. 수산질병관리원의 처방과 매일 진행한 약욕에 삼봉이는 회복하는 듯 하더니 성급하게 원 수조에 돌려보낸 내 잘못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래 살길 바라며, 비정상회담에서 장위안이 말했던 '300년 산 짱쌈뿅(張三峰)' 이름을 따서 삼봉이라 불렀는데 오래 살지 못했다.
오서방까지 떠나고 나는 한동안 정신과를 다녔다. 2020년 만난 후 4년여 만에 떠난 그가 너무 안타깝고 그리워서 계속 울었다. 날 고생시킨 기억뿐인데, 삼봉이의 죽음까지 뒤늦게 밀려와 나를 힘들게 했다. 정신과 의사 앞에 앉은 나는 스스로 어색함을 느끼며 오서방의 죽음과 나의 슬픔을 말했다. 펫로스 증후군을 이야기 하려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 내가 고작 손바닥 보다 작은 물고기에게 느낀 이 깊고 어이없는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환자로서 손님으로서 날 비난하진 않겠지만, 물고기의 죽음에 괴로워하는 나를 이상하게 보리라는 괴로움이 있었다. 나는 구구절절 왜 내가 물고기의 죽음에 펫로스 증후군을 느끼며 우울한지, 어째서 힘들어하는지 설명했다. 의사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고 했고, 내게 장례 등 정성껏 의식을 치러준다면 펫로스 증후군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조언해줬다. 나는 우울증 약을 조금 받아 집으로 와서는 죽은 오서방을 사료 몇 알과 함께 가진 것 중 조금 큰 화분에 묻었다. 사람은 어째서 이렇게나 나약해서, 왜 원초적 고독을 갖고 있어서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하고야 마는 걸까? 나를 고생시킨 기억에 사랑을 담지 말고 짜증만 담았다면 어땠을까?
‘물고기’ 오서방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을 병원에서 ‘그럴 수 있는 일’로 위로 받았지만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은 그럴 수 있는 일은 딱히 아니었다. 나는 오서방을 위해 애도하고 정신과를 다니며 울었음을 두어 번 말했다. 첫 번째는 다정한 위로를 받았지만 두 번째는 진짜냐고 되물으며 별난 사람 취급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어느덧 세상은 개와 고양이의 눈망울에서 느껴지는 진심과 하나하나의 개성, 사실 일방적이지만 쌍방향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의 감정을 존중하고 있다. 동물권의 이야기가 나오고 동물의 마음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늘어간다. 이런 세상에서도 ‘물고기’를 사랑한다는 건 괴짜스러운 일이다. 그들의 개성을 사랑하고 이름을 지어주고 어떻게든 살려보려 애쓰는 사람은 별종이다. 변기통에 열대어를 내리고 바다로 보내줬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개, 고양이와 달리 물고기는 물고기다. 물, 고기다. 그럼에도 내 마음에 미물이라는 그들이 남긴 너무 무거운 존재의 생채기가 있다.
물고기는 왜 물고기인가? 왜 하필 물, 고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