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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현 Sep 03. 2020

열대어와 생선

한 치 앞의 연민


꼈다. 자의로 저 자리에 끼이는 친구들이 굉장히 많다.


‘점프사’라는 게 있다. 어항의 수위가 높을 때 물고기가 수면 위로 띠용 뛰어올랐다가 물 밖으로 떨어져 그대로 죽는 것을 말한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적당히 몸이 무거워 차마 뛸 수 없는 물고기들을 중심으로 키웠기 때문에 딱 한 번 봤다.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왔더니 어항에서 딱 30cm 떨어진 바닥에 바싹 마른 물고기가 누워있었다. 1cm 남짓한 카디널 테트라 한 마리였다. 담담한 마음으로 작은 화분에 묻었지만 하루의 끝이 울쩍했다. 손가락 한 마디만한 작은 물고기의 죽음은 컸다.      


물고기와 함께 하다 보면 많은 죽음을 겪게 된다. 인간보다 훨씬 짧은 수명 탓도 있지만 병이 와서 보내는 때가 더 많다. 인간으로서는 어항 속 사정을 빠르게 알 수 없다 보니 낌새를 느낀 때는 이미 어항 전체가 초토화 직전이기 일쑤다. 외과적인 처치를 하면 나을까 싶은 물고기라도 받아주는 동물병원이 없다보니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어느 상황이든 인터넷과 책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카더라 통신에 의지해 얼렁뚱땅 이것저것 약을 넣어보는 게 할 수 있는 노력의 전부다. 그리고 살아달라고 응원하고 기도하기. 결과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다지 좋지 않다.

     

지금까지 함께 하다 물고기가 용궁에 가면 매번 기르는 화분에 묻었다. 그래서 코코는 드라세나 마지나타를 심은 화분에 잠들어 있다. 앵두나무 아래에는 바나나와 캔디가, 몬스테라 뿌리 밑에는 카디널 테트라들이 묻혀 있다. 사실 법대로 하자면 물고기의 사체는 일반 쓰레기로 쓰레기 봉투에 넣어서 해가 진 후 내놔야 하지만 다른  강아지와 고양이 보호자들이 그렇듯 그러지 못 했다. 그깟 물고기에 무슨 정을 그렇게 쏟았냐, 죽었을 때 울었냐 라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청계천 수족관거리에서는 어항에서 애어를 키우려는 사람들과 횟집을 운영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가게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아이러니는 여기에 있다. 어항 속 물고기 하나하나의 개성을 살피고 사랑하지만 정작 나는 생선 회를 아주 좋아한다. 회를 먹는 자리라면 당장 달려간다. 서울 여기저기에는 좋아하는 숙성 횟집과 초밥집이 가득하다.  

    

종종 주변인들에게 우스개 소리로 하는 이야기 중에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다. 이 이야기는 맹자 양혜왕 7편에 나오는데, 내용은 이렇다. 제선왕이 제물로 끌려가며 벌벌 떨며 무서워하는 소를 보고 안타깝게 여기고 대신 양을 제물로 받치라고 명령을 한다. 맹자는 그 행동을 칭찬하며 “그것이 측은지심입니다”라고 한다. 소는 안 되고 양은 되고? 맹자는 양이든 소든 왕은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고, 소는 봤지만 양은 못 봤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얼렁뚱땅 황당한 이야기지만 인간의 측은한 감정이 얼마나 알량하고 한 치 앞에만 있는지 간파한 이야기다. 어항 속 물고기를 애지중지하며 회를 먹는 내 모습이 딱 이거다.      


뒤늦은 변명이지만 물고기를 기르며 안 먹거나 못 먹는 음식이 늘기는 했다. 잔혹하게 죽는 꼼장어나 살아 있음이 곧 가치가 되는 산낙지나 그런 것들이다. 활어회도 좀 꺼리게 됐다. 위선적인 건 알지만 젓가락질 하며 몇 초는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르렀기를 바라게 됐다.      


그러나 오늘 하루도 어항 속 납작달팽이 잡아 없애기에 여념 없었다. 내 수초를 엉망으로 만드는 나쁜 녀석들! 나는 이렇게 얄팍하고 알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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