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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ylar Nov 30. 2023

기억 속에 갇히지 않는 법

어린 시절 나에게, 그리고 내면아이가 힘든 너에게

<너에게 보내는 위로>


오래전 좋은 기회로 상담을 받게 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아주 어릴 적 슬펐던 기억을 마주했다.

상담사가 나에게 말했다.


"지금 00 씨가 그때의 00 이와 함께 있다면

어떻게 해줄 것 같나요? "

그 순간 말도 안 되는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나는 이미 다 큰 어른이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도

선생님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목놓아 울어버렸다.


그 후,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어린 나에게

무엇을 해줄까 고민하곤 했다.

그리고 답을 찾았다.


"괜찮아. 나와 함께 가자."

하고 손을 잡고 나오는 것.

그때의 나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 순간, 그 기억은 내 안에서 힘을 잃었다.


때때로 슬픈 기억이 너를 지배할 때,

그때의 너에게 그저 손 내밀어 주고,

함께 걸어 나오길

그 기억이 너에게 아무런 힘을 쓸 수없길

바라보는 밤이다.



<나의 이야기>


마음이 힘들던 어느 날 좋은 기회로 심리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나의 어린 시절 기억으로 떠나게 됐다. 6살 어느 날 유치원에서 신나게 집에 오는 길이었다. 그때 당시 몸이 약한 엄마 대신 나를 보살펴주는 시터이모님이 계셔 같이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우리 집에서 빨간 이불 보따리가 이삿짐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엄마가 울고 있었고 그렇게 나의 떠돌이 생활은 시작되었다.


어릴 때 아빠는 나의 기억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아빠가 모르는 아저씨이고, 이름이 아빠인지 알아 아저씨 아빠라고 불렀다고 하니 말 다했다. 거의 30년 전에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기 쉽지 않았던 터라 친척집을 전전하다 아빠와 새엄마 집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은 나쁘지 않았다. 6살 때 처음 봤던 새엄마는 엄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젊었지만, 나를 예뻐하는 편이었다. 엄마랑 헤어져 슬펐지만 그래도 나는 새엄마에게 비교적 적응을 잘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유치원으로 나를 몰래 데리러 왔다. 그날 난 참 행복했다. 꿈에도 그리는 엄마였으니, 하지만 그 행복이 나중의 고통이 되리라고는 6살 꼬마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그 이후 8살 어느 날 다시 아빠에게 보내졌다. 그때는 나 혼자가 아니고 나의 언니와 오빠도 함께였다.


나는 터울이 많이 나는 늦둥이 막내다. 언니랑 오빠는 11살, 9살 차이가 나기에 고등학생이었고,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라 비는 시간 모두 새엄마와 지냈다. 그녀는 6살의 내가 연락도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한 원망을 8살의 나에게 쏟아내며, 나를 너무 싫어했다. 그때 넌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며, 나를 매섭게 몰아세웠고 나에게 정을 주지 않고 냉정하게 굴었다. 집보다 게임에 더 관심이 많았던 안팎으로 바빴던 아빠와 냉정한 새엄마, 집이 싫은 사춘기 언니, 오빠 그 사이 나는 갈 곳 없이 헤매었던 것 같다. 그 맘때 쯤 그녀의 아이도 태어났고 나는 점점 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8살 내가 생각하는 그 집은 늘 어두웠고, 차가웠고 어려웠다. 이상하게도 새엄마는 늘 내 손이 닿지 않을 가장 높은 싱크대 선반에 과자들을 꽁꽁 숨겨두었다. 어느 날은 너무 먹고 싶어 의자를 갖고 가 손을 뻗어보았지만 손이 닿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서러움이 쌓이던 어느 날, 나는 학교 준비물 도화지를 사려고 천 원을 받아 문방구로 향했다.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날 나는 200원짜리 두꺼운 도화지를 사고 300원짜리 빼빼로를 몰래 사 먹었다. 얼마나 맛있고 행복했던지. 그리고 집으로 와 거스름돈 500원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어린아이의 거짓말이 얼마나 어설펐는지, 그녀는 바로 나를 추궁하고 화내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무서워 도화지가 500원이었다고 계속 거짓말을 했다. 결국, 나는 자백했고, 손바닥 30대 정도 맞고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사는 곳은 좋은 신축아파트였다. 언니랑 쓰던 나의 방은 핑크로 꾸며진 예쁜 방이었고, 침대도 두대가 놓여있었다. 그 방에서 나는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으니, 예쁜 감옥이라 칭해야겠다. 그날 나는 방에 들어가서 반성하라고 지시받았기에 새엄마 기분이 풀릴 때까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침대 옆 협탁의 첫 번째 서랍을 숨겨둔 열쇠로 열었다. 내 보물이 들어있었다. 엄마사진액자. 그리고 그 서랍 속에는 온갖 사탕이 들어있었다. 8살의 내가 엄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날 어찌나 서러웠던지 엄마 사진을 안고 불도 켜지 않고 한참을 울다 잠이 들었다. 정신이 어렴풋이 들 때쯤에는 밖에서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던 스머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날의 나는 스머프가 너무 보고 싶었는지, 아니면 그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사랑받고 싶었었는지,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아들이 안고 TV를 보고 있던 뒤로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아, 이렇게 넘어갈 수 있겠다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쉴 때쯤 그녀는 뒤를 돌아 매섭게 째려보며 말했다. “누가 나오라고 했니? 나 아직 화 안 풀렸어 들어가.” 심장이 덜컥 떨어지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치 8살의 나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그 집 안에서 어떤 사랑도 받을 수 없을 거라는 선고. 그녀와 살았던 1년간의 나의 삶은 이렇게 외면과 차가움 속에 살아갔다. 그녀의 부모가 오는 날에는 언니, 오빠만 있는지 알았기에  나는 내 작은방 속 더 작은 붙박이장 속에 숨어 있어야 했다. 그녀의 가족들이 돌아갈 때까지 붙박이장 속에서 책을 읽거나 간식을 먹으며 버텼다. 운이 더 좋은 날에는 다른 집에 맡겨지기도 했다.


벌써 20년 전의 이야기가 아직도 서러웠을까. 지금은 세상 밝고 즐거운 나의 내면에는 언제나 이 아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행복할 때는 잊고 살다, 어느 날 내가 사람에게 상처를 받거나 삶이 힘들 때 살아서 내 심장을 난도질하며 덩치를 키웠다. 이 바래질 대로 바래진 기억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나에게 선생님이 물었다.


”지금의 네가 그때의 너를 도와줄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 같니? 지금 함께 있다면 말이야”


서른이 된 지금의 단단한 나라면 욕을 퍼부었을까? 머릿속에 잠시 생각이 떠올랐지만, 나는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라고 반복해 되뇌었다. 나는 대여섯 살의 나이부터 아무도 도와줄 수 없이 혼자 일어서야 했다. 퍼즐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내가 매사에 모든 것을 왜 이렇게 혼자 열심히 인지, 나는 왜 이렇게 모든 것에 심적인 부담감을 크게 느끼는지…. 나는 철저히 혼자였고 가족이 있어도 나에게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의 감정보다 어른들의 감정을 먼저 헤아려야 하는 아이로 자랐다. 그래야 다시 버려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내 감정을 돌보는 법도, 남과 내 짐을 나누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첫 번째 상담 후에 나는 내가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 이상하고 낯설고 어려운 기분이었다. 나는 늘 어려운 가운데서 비교적 잘 자라온 나에게 자부심이 있었다. 한낱  자기 동정심에 휩싸이게 된 나 자신이 한심하고 싫었다. 가족들에 대한 원망도 살아났다. 그때 너희들은 모두 어른이었으면서 아이인 나를 왜 지켜주지 않았나, 나를 왜 버려뒀었나 하는 분노가 일어났다. 며칠을 울고 분노에 떨고 난 후에야 불쌍한 나를 인정해 줄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시간 나는 그때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일들에 대해 고민해보고는 했다.


결국 나는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8살의 나를 찾아갈 수 있었다. 흐느낌이 흘러나오던 나의 방문을 열고, 환하게 불을 켰다. 그리고 침대에 혼자 웅크리고 있는 그 아이에게 도닥이며 말했다. “이제 나랑 우리 집에 가자”

나는 나의 손을 잡고 그 집에서 데리고 나와 몇 달 새 단단해진 마음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너는 그저 아이로 남아있어. 먼저 어른이 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어른이 된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하고 지켜주고 있노라고.


이제 그 시절 기억은 나에게 아프긴 해도, 나의 내면을 흔드는 기억이 되진 못한다. 나는 나를 만났고, 그리고 한껏 껴안아 줄 수 있는 단단한 어른으로 자랐기에. 우리는 어쩌면, 가슴을 헤집는 아픈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정할 수 있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면의 아이가 너무도 아픈 당신에게도 꼭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지금 당신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다고, 마주하고 손을 잡고 나올 때, 아마 당신도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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