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에 맞서기(feat. 마태복음)
산책 중이었다. 따뜻한 오후 햇살. 몽실몽실한 솜사탕 구름. 무릉도원에 왔다. 살랑 거리를 콧바람을 느끼며 여유롭게 잔디 위를 걷는다. 이 여유로움도 잠시. 웬 초등학생 남자애 두 명이 내 앞에 멈춰 선다. 뭐 하나 하는데. 갑자기 바지를 내렸다. 복숭아 같은 두 엉덩이가 내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이들은 휙 돌아보았다. 나를 보며 니~ 하오마를 리듬미컬하게 말했다. 혀까지 날름거리며 메롱도 했다. 중간중간 내 표정을 힐끔힐끔 살폈다. 별 반응이 없자 실망한듯 멀어져갔다. 참나~ 길가의 대변을 본냥 나는 고개를 돌렸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이 보였다. 그 위에 백조들도. 햇빛을 받은 하얀 깃털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어쩜 저리 우아할까 그 모습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강물에 허연 엉덩이들이 떠올랐다. 원숭이 흉내 낸 거잖아! 아 내가 동양인이어서. 뭐야?! 이건 인종혐오주의잖아! 판단이서자 부리나케 그놈들을 쫓아갔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계주 마지막 주자로 뛸 때 보다 더 빨랐다. 아이들은 공원 한편에 펼쳐진 돗자리에서 낄낄대고 있었다. 공휴일을 맞아 가족끼리 피크닉을 온 모습이었다. 나는 애들 부모에게 가서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엄마는 홍당무가 되어 쩔쩔매고 있었고, 아빠의 손에 든 플라스틱 와인잔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충격은 당연했다. 예의범절을 따지는 중산층 영국인들에게 인종차별적 행동이라니. 그것도 백주대낮에 공원에서!! 영국법상 인종차별은 형법으로 취급된다. 소년범도 형법에 연루되면 퇴학을 당하는 등 중처벌을 받는다. 내가 경찰 서에 리포트라도 한다면? 아이들의 상급학교 진학은 불투명하다. 부모는 진짜 미안하다면서 잘 교육시키겠다고 다짐까지 해 보였고, 아이들도 내게 직접 와서 정중히 사과했다.
내 목적은 사과가 아니었다.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법. 부모의 유색인종에 대한 태도를 아이들이 보고 자랐을 확률이 높다. 물론 또래 문화나 유튜브 같은 매체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가정교육이 아이들의 행동의 모든 원인이라고 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최선은 경고다. 있을 수도 있는 부모의 인종차별 의식과 행동을 일깨워 주러 갔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보고 들은 걸 따라 한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 부모들은 스스로 몰랐을 수 있다. 자신이 인종차별 주의자라는 걸.
처음 영국에 왔을 때 누가 니 하오마? 하면 불쾌했다. 중국인으로 보이나? 행색이 별론가? 안 씻었나? 물음은 계속되었다. 누가 중국인이라고 하면 왜 기분이 나쁘지? 아 내 눈에는 중국인이 후져 보이네. 그들이 열등하다는 편견이 있구나. 그 후 인종차별적 시선은 계속 감시 중이다. 마음 한 구석에CCTV를 달아놨다. 흑인을 봐도 무슬림이 지나가도 알제리 사람과 부딪혀도 돌아가는 중이다.
편견은 남을 향하는 것은 물론 나 자신을 향하기 때문이다. 백인이 황인종인 나를 낮게 보는 그 눈으로 내가 아시아인이 나를 인종의 위계에서 아래로 위치시킨다. 내가 중국인 대한 편견처럼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또 낮추어 보겠지. 그렇다면 영국에 사는 내내 아니 다른 곳에서조차 나는 열등한 존재가 된다. 인종은 어쩔수 없는 것이니까. 그래? 그럼 마음을 바꿔야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복음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