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켠서 Jul 12. 2022

텅 비어버린 도시에서 내가 찾은 것

기이한 해안도시, 시아누크빌

시아누크빌에서의 둘째 날. 어느덧 한국을 떠나온 지 9일째 되는 날이었다.


캄보디아식으로만 제공되는 조식을 먹고 아침부터 시아누크빌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 채비를 했다. A는 이곳 시내에서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다. 전날 도심에서 겪었던 교통체증이 엄청나게 스트레스였나 보다.


시아누크빌은 휴양지라서 그런가 확실히 구경거리가 많은 도시는 아니었다. 검색을 해 봐도 아침부터 둘러볼 만한 게 딱히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새로운 여행지니까, 꽤 큰 도시라니까, 뭐든 흥미로울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저마다 다양한 나라에서 떠나온 여행객들을 구경하는 것 마저 재밌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유명 휴양지라기엔 뭔가 수상한 이곳의 분위기에 호기심이 생긴 우리는 이 도시를 좀 더 둘러보고 싶었다. 도대체 뭐가 있길래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걸까? 이곳을 맴도는 이상한 긴장감은 뭘까?


특별한 목적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대충 도심과 가까운 세렌디피티 해변으로 가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마주친 툭툭 기사님과 짧게 흥정을 하고 뒷좌석에 올랐다. 아침부터 기온이 30도를 훌쩍 넘은 터라 바람도 후덥지근했다. 고작 며칠 사이에 날씨가 엄청나게 뜨거워졌다.


해변을 걸어보려고 했는데 툭툭에서 내리자마자 후회가 됐다. 내리쬐는 햇빛에 피부가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선글라스를 썼는데도 강한 햇빛에 눈이 부신지 A는 찡그린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래도 바다 색 하나는 끝내주게 예뻤다.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고 파도에 발을 적시며 시내 쪽으로 15분 정도를 걷다 보니 해변의 끝이 보였다.

정신이 나갈 만큼 뜨거운 날씨에 걸어 다녀야 한다니. 가까운 거리도 늘 오토바이로 이동했었던지라 이렇게까지 못 견딜 만큼 날이 더워졌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우리 잘못이었다. 평일 오전이라 도로도 한산했다. 그냥 오토바이를 타고 올걸 하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그저 시내를 둘러보고 싶은 것뿐이라 목적지가 없어 다시 툭툭에 오르기도 애매했다. 어제 갔던 도심 쪽으로 좀 더 걷다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고 무작정 걸어볼 뿐이었다. 그러다 줄지어 늘어선 옷가게에 들어가 티셔츠를 구경하기도 하고 작은 가게에 들러 시원한 음료수도 사 마셨다. 캄보디아에서 지내는 내내 달고 살았던 환타 후르츠 펀치 맛. 풍선껌 같은 단맛에 장난감 같은 색이라 마시면 여행 온 느낌이 퐁퐁 솟아났다.


더운 것 빼고 괜찮았는데 주변에 관광객이 우리뿐인 게 좀 이상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처럼 이 도시가 정말 유명한 휴양지가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뜨겁게 달궈진 길에 발바닥도 후끈거릴 즈음 갑자기 눈앞으로 텅 비어버린 도시가 펼쳐졌다.

아까 전 걸었던 해변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앙상한 콘크리트 뼈대만 남은 채 기이한 기운을 내뿜는 건물들. A도 나도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이게 도대체 뭐야......?


우리 둘 다 이 말 말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고작 몇 층짜리 건물이 아니라 고층 빌딩들이었기에 더 이상했다.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이라기에는 외관이 새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너무 많은 건물들이 일하는 사람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이곳이 시내라면 지상낙원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휴양지엔 어울리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덥기도 너무 덥고 방금 우리가 지나온 도심 풍경에 놀라기도 한 우리는 적당한 카페를 찾아 들어가기로 했다. 구글 지도에서 대충 모던한 느낌의 카페를 검색한 후 걸어서 십 분 거리라는 지도의 안내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내가 기대한 시아누크빌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는데. 내 계획 속 시아누크빌은 이런 모습이면 안 됐다. 영화 속 휴양지처럼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아름다운 곳이어야 했단 말이다.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완공되기도 전에 허물어져가는 빌딩들 사이에는 중국어로 적힌 간판들이 보였다. 화려하게 장식된 카지노들과 수상한 분위기의 쇼핑몰에도 중국어가 빼곡했다.  


지도를 보고 대충 상상한 시내의 모습도 실제와는 전혀 달랐다. 도시가 텅 비어버리다 못해 영혼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화창하다 못해 뜨거운 날씨에 비해 이곳의 분위기는 너무나 우울했다. 도시 전체가 가짜 같았다. 오히려 전날 떠나온 캄폿이 훨씬, 훨씬- 생동감 넘쳤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 타들어갈 것만 같은 더위 속을 기껏 걸어서 찾아간 카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살짝 멘붕이 오기 시작했다. 그냥 오피스텔 같은 건물들만 침묵한 채 서 있을 뿐 우리 주위에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다. 무작정 더 걸어보는데 A가 나를 불렀다. 저기 보이는 거, 저거 카페 아니야?


A가 가리킨 곳에는 이제 막 오픈한 듯 보이는 카페가 하나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내가 지도로 찾았던 그 카페였다. 지도 어플에 위치 설정이 잘못되어 있었던 건지 실제 목적지는 엉뚱한 데에 있더라.


카페에 들어가 시럽을 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한 우리는 쓰러지듯 자리에 앉아 헛웃음을 터트렸다.

여기는 어디지? 우리가 오기로 계획했던 지상낙원이라는 그 도시가 맞나?


어쨌거나 우리는 다시 숙소 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우리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면 시내를 더 돌아볼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더 이상 이 더위 속을 걸어 다니는 건 무리였다. 숙소로 돌아가 바로 앞 해변에서 수영이나 하고 싶었다.


늘 호객행위를 하던 툭툭 아저씨들도 막상 찾으려니 어찌나 어렵던지,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벌써 녹초가 다 되어 있었다.


잠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널브러져 있다가 바다에 가기 위해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제트스키를 타기로 했다. 겨우 툭툭을 잡아 숙소로 돌아오는 길, 주변 풍경을 구경하던 A의 눈에 해변에 세워진 제트스키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오! 저기 봐봐! 우리도 저거 타보면 안 돼?


신나서 눈을 반짝이는 A에게 싫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액티비티는 아니지만 여행지에 왔으니 한 번쯤 타보고 싶기도 했다. 제트스키들이 세워진 곳으로 걸어가니 나무 사이에 걸어둔 해먹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제트스키를 타려면 얼마를 내야 하냐는 우리의 물음에 그가 옆에 있던 나뭇가지로 숫자를 적었다. 삼십 분에 35달러, 한 시간에 70달러. 좀 더 싸게 해 줄 수 없냐는 말에 남자가 손사래를 쳤다.


꽤 비싼데? 그럼 삼십 분만 탈까? 그래, 그러자.

짧은 대화를 마친 우리가 삼십 분만 타겠다며 값을 치렀다. 남자가 건넨 구명조끼를 입은 우리는 수건과 선크림, 슬리퍼 같은 소지품은 해먹 아래에 맡기고 그와 함께 제트스키를 끌고 바다로 나갔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그는 직접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우리를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 파도를 거슬러 앞으로 나갈 때마다 얼굴에 물이 계속 튀어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A에게 운전하는 법을 대충 가르쳐준 남자는 재밌게 놀으라는 말과 함께 해변으로 돌아갔다.


제트스키는 자동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것과 비슷했기에 운전이 어려운 건 아니었다. 다만 바닷물이 계속 눈에 들어가 제대로 앞을 보기가 힘들었을 뿐 파도를 타고 위아래로 흔들리며 달리는 것 자체는 굉장히 재밌었다. 게다가 파도가 엄청 높은 것도 아니라서 무섭지는 않았다.


우리가 제트스키를 타는 걸 해먹에 앉아 지켜보던 남자가 갑자기 우리 쪽으로 손짓을 하더니 바다 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영문을 모르겠는 우리도 얕은 물가로 운전을 해 갔다. 우리가 너무 답답해 보였는지 다시 핸들을 잡은 그가 빠른 속도로 운전을 시작했다. 파도를 거슬러 튀어 오르듯 달리기도 하고 시원하게 방향을 꺾기도 하면서 이런 식으로 운전을 해보라고 한 후 그는 다시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하도 얼굴에 물세례를 맞는 바람에 눈이 시큰거렸다. A가 나더러 제트스키를 운전해보고 싶냐고 물어봤지만 앞자리에 타면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했다. A도 바닷물에 눈이 따가운지 제트스키를 탈 때는 꼭 물안경이 필요할 것 같다며 다음에는 꼭 물안경을 쓰자고 했다.


삼십 분이 지나 다시 해변으로 나오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한 시간을 타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숙소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결한 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를 둘러보기로 했다. 시아누크빌 도심에서 꽤 거리가 있는 이 동네에도 우리가 시내에서 본 것처럼 짓다 만 건물들이 꽤 많았다. 뼈대만 남은 채 스산하게 서있는 건물들도 역시 많았지만 어떤 빌딩들은 창문까지 다 달려있는데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사실 이곳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한가한 동네라 해도 캡이나 캄폿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전날 우리는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피자가게를 검색해 찾아갔었다. 오토바이로 운전해 갔는데도 동네가 너무 텅 빈터라 사방이 어두워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게다가 우리가 찾아간 음식점은 문을 닫은 건지 흔적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골목들을 살펴보던 우리는 간신히 손님들이 있는 음식점을 발견했다. 안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유럽인들이 반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A도 똑같이 느꼈는지 유럽인들이 있다는 게 이렇게 안전하게 느껴질 줄 몰랐다고 속삭이더니 웃었다.


우리 말고도 다른 여행객들이 이곳에 있다는 게 꽤나 안심이 됐다. 포장해 간 피자가 너무 맛이 없었기에 다시 그 음식점으로 돌아가진 않았지만 이곳은 그 정도로 수상한 긴장감이 맴도는 동네였다.

아무튼 그때는 밤이었고 피곤했던 탓에 동네를 제대로 구경하기 어려웠지만 이번에는 해가 지기 전이라 숙소 주변을 더 자세히 둘러볼 수 있었다. 작은 동네라 오토바이를 타고 구경하기 적절했다. 도로 위로 자동차나 오토바이도 많이 다니지 않아 짓다 만 건물들이나 폐허로 남은 건물들을 천천히 둘러보기 좋았다.


A가 갑자기 신이 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너 지금 오토바이 운전해볼래?


캄폿에서부터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겠다며 그가 호들갑을 떨 때마다 나는 텅 빈 도로가 아니고서는 싫다고 거절해 왔었다. 여기서는 면허가 없어도 오토바이를 빌리거나 탈 수 있다지만 원래 도로를 무서워하는 나로서는 그의 제안이 썩 달갑지는 않았더랬다.


우물쭈물 넘기려는 내 반응에 A가 정말 괜찮을 거라며 빈 도로를 찾아 오토바이를 세웠다. 주위에는 텅 빈 건물들과 공터 밖에 없어 적어도 내가 누군가를 다치게 할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레깅스라도 입고 오는 건데, 하필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안장에 앉는 것조차 썩 편하지는 않았다. 입을 삐죽 내민 채 울상을 지으며 혼자 안장에 앉은 나에게 A가 설명을 시작했다.


-시동은 이렇게 거는 거야. 알겠지? 이건 프런트 브레이크, 이거는 백 브레이크고... 자, 봐봐. 오른쪽 손잡이를 이렇게 당기면서 속도를 조절하는 거야.


늘 A의 뒤에 앉아만 있었기에 오토바이 몸체가 이렇게 무거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시동을 걸고 출발하면서 두 다리를 오토바이 위로 올려야 하는데 이것조차 넘어질까 봐 얼마나 겁이 나던지. 그래도 하면 할수록 재미는 있더라.


직진 코스 운전은 이제 좀 한다 싶었는지 A가 나더러 유턴을 해보라며 오토바이를 멈추지 않고 이쪽으로 돌아와 보라고 했다. 도로가 좁은 것도 아니었는데 유턴을 하려고 할 때마다 오토바이의 중심을 잡기가 정말 힘들었다. 사실 내가 겁이 많은지라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잡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혼자 타고도 균형을 잡기 벅찬데 A는 나와 짐까지 싣고 어떻게 그 긴 여정을 운전해 왔을까 싶어 미안하면서도 그가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몇 번의 연습 후에도 유턴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좌회전이나 우회전은 할만하다고 느꼈다.

쫄보인 나는 고작 시속 20킬로미터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하하.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던 A가 이번에는 자기가 뒤에 타보겠다며 나를 멈춰 세웠다.

-원래 뒤에 타는 게 훨씬 무서운 거 알지?

내가 그에게 경고했다.

-괜찮아. 네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타보고 싶어!

A가 신이 난 듯 대답했다.


뒤에 사람이 타고나니 무게 때문에 중심을 잡는 게 훨씬 어려웠다. 적어도 자동 오토바이라 조작법이 쉬워 다행이었다. 시속 20킬로미터로 운전해도 도로가 워낙 한가해 걱정할 건 없었다. 우리는 주행 연습을 하던 빈 도로를 벗어나 짧게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오토바이를 빌렸던 첫날 내가 A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 애가 나를 계속 칭찬해줬다.


브레이크를 밟기 전 먼저 속도를 천천히 줄여야 하는데 A가 첫날 그랬던 것처럼 나도 속도를 줄이는 데에 먼저 신경을 쓰기보다는 브레이크를 한 번에 밟아버리는 실수를 계속했다. 겁을 내면 이렇게 되는구나. 그때 그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됐다.


그리고 도로 위에서는 계속 엄청난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핸들을 쥔 손바닥이 금방 축축해진 것이 느껴졌다. 운전을 하면서도 무섭다고 잔뜩 칭얼거리는 나에게 엄청난 칭찬 세례를 보낸 A조차도 사실 뒷자리에 타고 있는 게 겁이 나긴 했을 거다. 뒤에 탄 사람은 운전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오토바이 강습(?)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여전히 쉴 수 없었다. 여섯 시에 가기로 한 투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계획된 투어는 아니었다. 아까 전 제트스키를 탄 후 바다에서 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투어를 시켜주겠다는 캄보디아 사람들을 만났었다. 어두워지면 이 앞바다에서 빛을 내는 플랑크톤을 볼 수 있는데 자기들에게 배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플랑크톤과 함께 밤바다에서 스노클링을 할 수 있다고도 했다.


텅 빈 도시는 이상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할 수 있는 건 해봐야지. 나와 A는 시간에 맞춰 카페 아마존 앞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곧 나타난 두 남자는 배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오토바이를 타야 한다며 나와 A를 각자 오토바이 등 뒤에 태우고 어디론가 향했다. A는 나를 태운 사람이 혹시나 나를 납치해서 도망가는 건 아닐까 그의 오토바이를 노려보고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우리는 배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날 저녁 우리의 투어 가이드가 되어 준 한 남자는 자신을 미스터 본이라고 소개했다. 배를 타고 바다 위에서 노을을 보는 건 정말 새로웠다. 미스터 본은 해가 다 저물기 전에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우리더러 갑판에 서 보라고 했다. 생각보다 중심 잡기가 어려웠지만 덕분에 좋은 추억을 사진을 남겼다.

사십 분 정도 배를 타고 나갔을까, 플랑크톤을 보려면 해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길래 우리는 바다 위에서 시아누크빌 야경을 감상하며 주위가 캄캄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미스터 본이 바다에 막대를 넣고 휘저어 보더니, 이제 플랑크톤이 빛을 내는 게 보일 거라며 스노클링을 하러 들어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나도 고개를 배 밖으로 내밀고 어둠이 자욱이 깔린 바다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 내 말에 미스터 본은 물안경을 쓰고 들어가야 보일 거라고 대답했다. 물장구를 치거나 바닷물을 휘저을 때 플랑크톤이 반짝거리며 빛을 낼 거라고 말이다.


사실 나는 캄캄한 밤바다에 반짝반짝 올라오는 플랑크톤이 선명하게 보일 거라는 기대를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밤바다에서 수영을 해보는 건 살면서 한 번도 안 해본 거라 신이 나기도 하고 살짝 무섭기도 했다. 다행이었던 건 나는 수영에 자신이 있는 편이라는 거다.


바다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배에 붙은 사다리를 잡고 내려가야 했는데 주위가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 보니 이게 조금 무서웠다. 다행히 먼저 내려간 A가 아래에서 도와주고 위에서는 미스터 본이 잡아줘서 안전하게 바다로 잘 입수할 수 있었다.


미스터 본이 나와 A에게 나눠준 물안경을 꾹 눌러쓰고 숨을 들이쉰 뒤 잠수를 해봤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물장구를 칠 때마다 내 주위를 둘러싼 플랑크톤들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밤하늘을 스노우볼로 만들면 이런 느낌일까? 그 스노우볼 속에서 수영하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바다는 차갑지 않았고 우주처럼 고요하고 어두운 밤바다를 수영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다만 파도를 잘 타지 못하면 파도가 칠 때마다 얼굴로 다 맞아야 해서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도 너무나 새로운 경험이잖아!


물론 주위에 뭐가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어두운 게 좀 무섭기는 했다. 그래도 나는 가끔씩 사다리를 잡고 쉬기도 하며 잘 놀고 있었는데 A가 예상보다 너무 힘들어하는 것이다. 파도 때문에 숨 쉬기가 힘들어 자꾸 물만 먹고 있다길래 그가 사다리를 잡고 쉴 수 있도록 내가 직접 끌어서 데려와야 했다.


-너 수영 못해?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영국의 섬마을에서 자란 A였기에 당연히 수영은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할 줄은 알지. 근데 잘 못해. 이렇게 깊은 곳에서는 제대로 수영해 본 적 없어.

사다리를 잡고 가쁘게 숨을 내쉬며 A가 대답했다.

-나는 너 수영 진짜 잘하는 줄 알았어.

내 말에 A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나 수영 못하나 봐.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파도 때문에 우리는 연신 젖은 얼굴을 바다에 닦아냈다. 나는 A에게 네가 빠지면 내가 구해주겠다며 허풍을 떨었다. 미스터 본은 바다에서 수영하는 우리를 찍어주기 위해 연신 휴대폰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내가 타이만 바다에서 밤 수영을 하게 될 줄 예상이나 했던가.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푸흐흐- 웃음이 났다. 어딘가 결여된 듯 느껴지는 이 도시에서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짭짤하게 젖은 여름밤 냄새, 첨벙거리는 물소리, 저 멀리 보이는 육지의 야경, 머리 위로 총총 뜬 별들, 그리고 나와 같은 풍경을 담은 연인의 눈동자까지.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행복이었다.


그래, 이 도시가 내가 기대했던 지상낙원이 맞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어디서든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삶은 그래서 멋진 것인가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기, 진짜 지상낙원 맞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