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해안도시, 시아누크빌
이틀 전, 밤바다 스노클링 가이드를 해줬던 미스터 본은 그 이튿날부터 우리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 다른 투어를 시켜주겠다는 것이다.
딱히 더 투어를 할 마음이 없었던 우리는 그에게 혹시 코롱 섬까지 데려다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지금 코롱 섬 주변은 파도가 너무 세서 자기 배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코롱 섬 보다 가까운 섬이 있다며 코타키브 섬(Koh Ta Kiev)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코롱 섬만큼 아름다운 데다가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라 더 특별하다는 섬. 거기로 우리를 데려다주겠다는 거다. 그는 자기 친구가 그 섬에서 숙소를 운영 중이라 숙소 예약까지 자기가 도와줄 수 있다며 우리를 설득했다.
A가 미스터 본이 보낸 메시지를 보여주며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할래? 거절할까? 어떻게 하고 싶어?
사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부터 코롱 섬에 기대가 컸던 건 나 혼자 뿐이라 A가 내 의견을 중요하게 묻는 게 이해가 됐다. 내가 섬에 가보고 싶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A는 별 미련 없이 시아누크빌을 떠났을 테니까. 그래도 혼자 결정을 내리려니 어려웠다. 가장 기대했던 여행지가 시아누크빌이었는데 이곳은 그 기대와 너무 달랐으니까, 코롱 섬도 그럴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는 미스터 본의 설득에 넘어가버렸다. 다음날 그를 만나 배를 타고 코타키브 섬에 가서 하루를 묵은 후 시아누크빌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걱정은 오토바이였다.
섬에 오토바이를 가지고 갈 수 없으니 어딘가에 맡겨둬야 하는데 마땅히 믿고 맡길 곳이 없어 걱정이었다. 섬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으니 짐도 다 가지고 가야 하는데 미스터 본의 배를 타려면 우리가 처음 묵었던 숙소 근처까지 직접 이동해야 했다.
사실 그 호텔까지 직접 운전해 간 뒤 오토바이를 그곳에 맡겨둔 후 그다음 날 돌아오자마자 오토바이에 바로 오를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호텔 직원들이 밤이면 다 퇴근을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냥 여기 주차한 곳에 세워둘까? 아무도 신경 안 쓸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던 A가 말했다.
이때 우리는 이미 시내에 있는 숙소로 옮겨간 상태였는데, 여기가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기도 하고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는 곳이라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가도 도난당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섬에서 돌아온 뒤에 바로 시아누크빌을 뜨지 못하고 다시 시내로 돌아가 오토바이를 찾아야 한다는 게 상당히 번거롭기는 했지만 적어도 도둑맞는 것 보다야 나으니까.
오토바이를 두고 갈 곳을 찾으니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그렇게 시아누크빌에서의 넷째 날이 밝았다.
체크아웃은 열두 시였지만 그때 미스터 본을 만나기로 했기에 나는 조금 일찍 잠에서 깼다. 들고 다닐 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전날 가게에서 샀던 김치라면을 아침으로 먹기로 했다. 전날 밤, 낯선 거리를 열심히 걸어 다니느라 쌓인 피로가 한국식 라면 하나에 다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역시 여행 와서 먹는 라면이 제일 맛있다.
라면을 준비해줄 테니 아침을 먹겠냐며 A를 깨웠다. 그는 누적된 피로 때문에 피곤한지 더 자야겠다며 혼자 밥을 먹으라 말하고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섬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못 먹을 텐데 괜찮겠냐는 물음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준비하고 떠날 시간이 되어 A를 깨우고 서둘러 짐을 쌌다. 대충 뜯지 않은 캔음료는 비닐봉지에 넣어 챙겼다. 체크아웃 후 숙소를 나서기 전, 로비에 있는 직원에게 여기 주차장에 잠깐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어딜 다녀와도 되겠냐고 물었다. 물론 하루 뒤에 찾으러 올 거지만. 직원이 별다른 말 없이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 본을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기 위해 툭툭을 불렀다. 짐을 짊어지고 툭툭을 기다리는데 전날 창문 너머로 우리가 봤던 큰 구덩이와 텅 빈 건물들이 더 가까이 눈에 보였다. 아침에 봐도 으스스한 풍경이다. 비가 오려는지 아침부터 하늘이 흐렸다.
툭툭을 타고 며칠 전에 묵었던 시아누크빌 외곽 쪽으로 가는 내내 A는 이상하리만치 툴툴거렸다. 아침부터 이유 없이 까칠하게 구는 남자친구 탓에 나도 심기가 불편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 바로 앞 카페에서 커피를 산 후에도 둘 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마 우리를 데리러 온 미스터 본도 느꼈을 거다. 둘 다 기분이 팍 상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배에 올랐으니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지 십분 쯤 됐을까, A가 아까는 짜증을 내서 미안하다며 풀이 잔뜩 죽은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유 없이 왜 그렇게 예민했냐는 내 물음에 그가 입을 삐죽 내밀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 도시가 싫어. 여기 있고 싶지가 않아. 이 도시가 기분 나쁜 기운을 뿜어내는 것 같아. 이상해.
울상인 얼굴로 A가 한숨을 짧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게 네 잘못이 아닌데... 내가 짜증내서 미안해.
어젯밤, 시아누크빌 시내를 아무리 헤매고 헤매도 멀쩡한 술집 하나 찾을 수 없었던 건 솔직히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이 도시에 대한 인상이 좋으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평화로운 휴양지일 줄로만 알았던 여행지가 공사판 유령도시에 차이나타운으로 변해있을 줄 누가 알았는가. 아침에 툭툭을 기다리며 다시 마주해야 했던 스산한 도심의 풍경까지, 나는 A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제 여행의 절반을 지나왔다고 생각하니 여기서 보낸 시간이 아쉬웠나 보다.
우리와 미스터 본을 태운 배는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파도를 가르며 달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걸렸다. 사실 배에 오르기 전 왕복 50달러라는 뱃삯과 30달러의 숙박비를 지불했었는데, 나는 이때부터 뭔가 찝찝했었다. 아무리 우리가 두 명이더라도 도합 80달러는 지나치게 비싸게 느껴지는 거다.
코타키브 섬 해변 가까이 배가 다다르자 미스터 본이 닻을 내렸다. 그리고는 우리더러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라며 자기도 곧 뒤따라가겠다고 덧붙였다. 내가 이때 뭘 입고 있었더라?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깊이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짐을 다 짊어진 채 뭍으로 올라오니 해변 바로 앞으로 허름한 나무 오두막들이 여러 채 보였다. 캡에서 지냈을 때 묵었던 bungalow와 비슷한 형태의 집이었다. 그보다 훨씬 허름한 오두막이었지만 말이다.
미스터 본이 말한 숙소가 이건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1박에 30달러를 지불했는데 겨우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이라고? 캄보디아에서 이 정도 돈이면 최소 3성급 호텔에서 묵을 수 있는 걸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게다가 캡에서 묵었던 오두막은 이보다 훨씬 저렴했다.
어느새 우리에게 다가온 숙소 주인이 우리를 방으로 안내하겠다고 했다. 이미 오두막을 바라보는 내 표정에서 모든 걸 다 읽은 A는 어쩔 줄 몰라했다.
안내를 따라 배정받은 오두막으로 들어가 보니 더 가관이었다. 나무로 지었으니 군데군데 틈이 있기 마련이라지만 지붕과 벽이 꼼꼼히 마감되어 있지 않아 뚫린 집이나 다름없었고 쇠창살이 있다고 해도 창문을 걸어 잠글 수 없다는 게 불안했다.
그리고... 화장실에 샤워기가 없었다. 대신 물이 가득 찬 커다란 드럼통에 플라스틱 바가지 하나가 덩그러니 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불편하면 샤워를 하지 않으면 되지만 세면대나 변기도 위생적으로 너무나 더러운 상태였다.
숙소 주인이 우리에게 이리저리 방을 보여주며 매트리스와 이부자리를 챙겨주는 사이, 미스터 본이 방으로 들어왔다. A를 포함해 그 방에 서 있는 세 남자 모두 내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게 느껴졌다. 미스터 본 본인도 이런 숙소를 30달러에 소개해준 게 민망했을 거다.
내 떨떠름한 반응 때문에 숙소 주인과 미스터 본이 어색하게 방을 떠난 후, 나는 A에게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난 이 방이 낡거나 더러워서 화가 난다기보다는 이 방에 30달러를 내라고 한 저 사람들에게 화가 나. 10달러를 냈다면 나도 불평 안 하지.
이때는 정말 화가 났었다. 호화스럽기를 바란 게 아니다. 적어도 안전하고 깔끔하기를 바랐었다. 그 정도 가격이면 이만큼은 바랄 수 있었다. 미스터 본과 숙소 주인이 우리를 그저 지갑으로 밖에 보지 않는 것 같아 화가 났다.
단단히 화가 난 나에게 A는 자기가 숙소 주인과 말을 나눠보겠다며 잠깐 기다려보라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진짜 이 도시에서는 왜 이렇게 되는 게 없지? 이 모든 상황이 황당했다.
우리가 이렇게 숙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이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맑아졌다. 해변을 바라보며 화를 식히고 있는데 A가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이렇게 전했다.
-미스터 본이 숙박비는 숙소 주인이랑 얘기하래서 말은 해봤는데... 환불은 못해주겠고 가격도 5달러 이상은 안 깎아주겠대.
A가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얘기할게.
단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 나는 미스터 본과 숙소 주인이 앉아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나를 바라보는 두 남자의 표정에서 왜인지 여유가 느껴졌다. A가 나긋나긋하게 말해줬다고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나는 영어로 하는 말싸움에도 져본 적 없는 사람인데.
-나는 이 숙소에 30달러 못 주겠어. 저 방이 30달러라는 건 말이 안 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남자들에게 말했다.
-10달러 이상은 줄 수가 없어. 저건 딱 그 정도 가격이야.
화를 단단히 참고 있는 내 목소리에 미스터 본이 당황한 듯 자기 친구를 쳐다보았다. 숙소 주인은 멋쩍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
-이러지 마~ 우리 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힘들었는데, 좀 봐줘~
그는 그 말을 하면서 두 팔을 앞으로 뻗어 해변과 바다 쪽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아름다운 풍경! 이 풍경 값이라고 생각해~
정말 어이가 없었다.
-아니. 싫어.
나는 더 단호한 목소리로 최대한 화를 참으며 남자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 섬에서 묵지 않고 잠깐 구경만 하고 가는 거였으면 그 돈 안 내도 됐잖아.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30달러면 프놈펜에서도 3성급, 운 좋으면 4성급 호텔에 묵을 수 있어.
나는 이렇게 말하며 우리가 배정받은 숙소를 가리켰다.
-나는 저 방에 10달러밖에 못 줘.
그리고는 벙쪄있는 남자들에게 한 마디 더 덧붙였다.
-풍경 타령하지 마. 이 섬이 당신 거라면 다른 관광객한테도 입장료를 받아.
숙소 주인이 할 말을 잃었는지 난처하게 웃었다.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안다. 그저 이런 식으로 바가지를 뒤집어쓰기 싫었을 뿐이다.
-20달러, 어때?
그의 말에 내가 또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12달러.
-그럼 15달러. 딱 반만 줘. 반은 돌려줄게. 더 이상은 우리도 어려워.
남자가 더 이상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참을 수 있다. 그래, 알겠어. 내가 대답하자 이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미스터 본이 내게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미 지불한 숙소 값 중 절반을 돌려받은 우리는 스노클링을 하러 갈 준비를 했다. A가 괜찮냐고 묻는데 한숨이 나왔다. 15달러를 돌려받았는데도 오늘 밤을 이 방에서 잘 자신이 없는 거다. 캡에서 비슷한 나무 오두막에 묵었을 때와는 느낌이 좀 달랐다. 아니면 그 후로 너무 좋은 숙소에서 묵었기에 기대가 높아진 걸까. 우리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여행객일까.
우리는 일단 스노클링을 하며 생각을 더 해보기로 했다. 솔직히 다시 육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돌아간대도 잘 곳이 없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스노클링 장소로 데려다주겠다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스터 본이 보였다.
주위가 다 해변인데 스노클링 할 장소가 따로 있다니 신기했다. 생각보다 좀 거리가 있는지 많이 걸어야 했다. 숲에 난 길을 헤치며 걷는 동안 바닷물에 젖은 발에 나뭇가지며 흙과 모래가 잔뜩 달라붙었다. 슬리퍼를 신고 걷기에는 험한 길이었다. 덤불을 헤치며 걷다가 문득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졌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니?
험한 비포장 도로를 오토바이로 달릴 때도 몇 번 했던 생각이었다. 사서 고생이나 다름없는 우리의 모습에 김 빠진 웃음이 나왔다.
나중에 한국 돌아가면 친구들한테 말해 줘야지. 애들이 재밌어할 거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산호해변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보였다. 스노클링 하기 가장 좋은 장소라는 말이 덧붙여 있었다.
숲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동안 주위로 다 무너져 내리는 오두막과 집들이 보았다.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며 잔해들이 널려 있는 걸 보니 버려진 집들인가 보다. 집들을 가리키며 내가 A에게 말했다.
-원래 여기도 나무 오두막으로 지어진 게스트하우스였나봐.
팬데믹의 여파로 관광지가 타격을 입었으리란 건 예상했지만 막상 이렇게 다 쓰러져 버린 집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씁쓸하기는 했다.
미스터 본은 우리가 스노클링을 하는 동안 그늘에서 쉬고 있겠다며 구멍이 숭숭 뚫린 오두막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도 미스터 본이 건네준 물안경을 들고 바다로 들어갔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산호들을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산호들이 어두운 색이라 아쉬웠다. 바다는 얕고 산호초는 날카로워 발바닥이 아팠지만 이따금 돌아다니는 물고기들도 구경하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A가 결국 발가락을 산호초에 살짝 베이고서야 바다에서 나왔다.
스노클링 했던 바다 앞에서 사진도 찍고 다시 숲을 가로질러 숙소가 있는 해변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벌써 오후 4시에 가까웠다. 이때까지 A는 하루 종일 먹은 게 아이스커피 한 잔 뿐이었다. 먹을 만한 게 없어 들고 온 캔음료라도 먹으라며 A에게 쥐어 주었다. 이때까지도 우리는 하루를 여기서 묵는 게 맞는지 고민 중이었다.
일단 숙소에 딸린 식당이 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려고 방문을 잠그려는데 잠가지지가 않았다. A가 낑낑거리며 방문을 닫아보려 했지만 애초에 두 문짝이 아귀가 맞지 않는데 문이 제대로 닫힐 리가 없었다. 아까는 바로 앞 해변에서 스노클링을 할 줄 알고 대충 살짝 닫아만 두고 가느라 몰랐다. A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출입문이 제대로 닫히지도, 잠기지도 않는 방에서 우리가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까. 내가 숙소 주인과 흥정할 때까지도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던 그가 폭발했다. 이건 말도 안 돼! 문을 다 열어 놓고 자라는 말이야?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래?
-가자. 그냥 다시 시아누크빌로 데려다 달라고 하자.
A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친구의 배에서 다른 캄보디아 인들과 바베큐를 굽고 있던 미스터 본이 우리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 헐레벌떡 해변으로 나왔다. 짐을 챙겨 나오는 우리에게 그가 왜 오늘 돌아가고 싶냐고 물었다.
-저 방에서 묵고 싶지 않아. 그래서 돌아가는 거야.
미스터 본에게 짧게 본론을 전하자 그가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해변에 떠 있는 자기 배를 가리키며 먼저 타 있으라는 말을 전했다. 몇 시간 만에 다시 배에 오른 A와 나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배가 고프다며 울상을 짓는 A가 안쓰러워 그의 등을 토닥여줬다. 맑게 개었던 하늘에 다시 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대체 뭘 믿고 낯선 사람을 따라 이름도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섬에 갔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었다면, 마음만 먹었다면, 우리를 어딘가로 팔아넘겼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무방비하게 섬으로 향한 거였고 결론적으로는 사기나 다름없는 양의 돈을 지불하고 다녀온 게 됐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다시 한 시간 넘게 배를 타고 나서야 육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 봤자 우리는 아직도 이 도시를 벗어나지 못했다. A는 이 도시가 우리를 놓아주고 싶지 않은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배에서 내린 후, 오토바이도 없는 우리가 밥을 먹기 위해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전날 체크아웃을 했던 호텔 레스토랑이다. 짐을 짊어지고 터덜터덜 들어오는 우리에게 직원들이 반가운 듯 웃으며 인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살짝 내리다 그칠 비라고 생각했는데 굵어진 빗방울은 멈출 줄을 몰랐다. 우리는 그 섬을 일찍 떠나서 다행이라고, 더 늦었으면 발이 묶일 뻔했다며 안도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이제 계획을 세워야 했다.
우리는 지금 숙소가 없는 홈리스 신세고,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다. 오토바이는 오늘 아침 체크아웃을 한 숙소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데다가 시간도 벌써 저녁 다섯 시 반이었다.
A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빠졌다. A는 한시라도 빨리 이 도시를 떠나고 싶다고 했다. 이 기묘한 도시에서 벌써 4일째 머물고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밥을 먹고 오토바이를 찾아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곧 어두워질 텐데 시아누크빌에서 벗어나려면 4번 국도 위를 달려야 했다. 캄폿에서 보코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해가 져 버려 어두운 고속도로 위를 잠시 달린 적 있기에 우리 둘 다 어둠 속 운전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음날 시아누크빌을 빠져나가기 쉽도록 애초에 더 외곽 쪽에 숙소를 잡아 그쪽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 고속도로를 통하지 않고도 가능했기에 그 정도면 밤 운전도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그 주변 숙소를 예약하기 위해 검색하고 또 검색했지만 왜인지 신뢰할 만한 숙소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너무 한적한 곳이라 그런 것 같은데, 당시 우리로서는 불확실한 것에 우리의 안전을 걸 수 없었다.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니 그렇게 뜨거웠던 날씨가 쌀쌀하게 느껴졌다. 따듯한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지난 며칠간 우리를 계속 봐 왔던 호텔 사장님이 커피는 무료로 주겠다며 미소를 지었다. 속상한 마음이 조금 달래진 것도 같았다.
우리는 결정을 내렸다.
이 주변 숙소에 방을 잡은 후 짐을 두고 툭툭을 불러 오토바이를 찾아 다시 운전해 오기로 했다. 너무 먼 곳으로의 이동은 무리인 것 같아 내일 도시를 떠나기로 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호텔에서 하루를 묵을 수도 있었지만 A가 이곳을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걸 알았기에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결론을 내렸다.
오토바이가 없었기에 비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더니 어느덧 시간은 여섯 시 반이 훌쩍 넘었다.
비가 완전히 멎은 건 아니었지만 더 늦기 전에 우리가 찾아본 숙소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서둘러 그곳을 찾았다. 하지만 호텔 문을 열고 엉거주춤 들어온 우리에게 직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방이 없다고 하더라.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아직까지 홈리스 신세를 면하지 못한 우리는 좌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다시 오늘 체크아웃을 했던 숙소로 돌아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오토바이는 거기에 있으니까 다시 찾으러 갈 필요는 없다.
에어비앤비로 빠르게 같은 숙소를 찾아 예약을 했다. 전날 지불했던 가격보다 훨씬 비쌌지만 그런 걸 따질 입장이 아니었다. 적어도 묵을 곳은 정해졌으니 다행이다. 어플로 툭툭을 부르고 기다리는 동안 길가의 가판대를 기웃거리며 구경하던 우리는 A가 입을 하와이안 반바지를 샀다.
작은 툭툭 안에 두 명 분의 짐과 우리를 욱여넣으니 뒷좌석이 꽉 찼다. 우리는 시내를 향해 달리는 툭툭 안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 이상의 불운은 없겠지, 이제 곧 쉴 수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얼른 마음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갑자기 툭툭 기사님이 숙소로 올라가는 언덕 초입에서 툭툭을 세우는 거다. A가 언덕 위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목적지는 위에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비가 와서 툭툭이 이 경사를 올라갈 수 없다며 못 간다고 손사래를 쳤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아직도 불운이 끝나지 않았다는 게 화가 났다. 짐을 짊어지고 비를 맞으며 가로등도 없는 이 언덕을 올라야 하는 게 어찌나 짜증 나던지 나는 그가 들으라는 듯 투덜거리며 툭툭에서 내렸다. 목적지까지 가지도 않았으니 원래 줘야 하는 돈보다 1000릴을 덜 주겠다고 그에게 말하자 그가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남자와 고작 한화로 300원쯤 될 금액을 가지고 옥신각신 하다가 A의 만류로 포기하고 돌아섰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고작 삼백 원 아끼자고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딱히 미안해하지 않는 그의 태도와 그래도 돈은 다 받겠다는 심보 모두 싫었다고! 나를 걸어 다니는 지갑처럼 보는 게 기분 나쁘다고!
이 도시가 더 싫어졌다.
절대적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상대로 자꾸 못되게 굴게 되는 내가 싫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를 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섬에서 숙소 주인에게 화가 난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나만 호구되는 것 같아 싫은데 그들을 상대로 화를 내자니 그런 내가 미워졌다.
다시 이 도시를 방문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A가 동의했다.
깨달은 게 있다면 예쁜 바다와 넓고 깨끗한 해변이 있다고 다 완벽한 휴양지가 될 수는 없다는 거였다. 즐겁고 평화로운 휴가는 고작 그걸로만 완성되는 게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 멋진 해안도시처럼 보이는 이곳에서 우리는 제대로 마음이 편했던 적 없었다. 이상했다. 기이한 분위기는 둘째 치더라도 도시에 깔린 긴장감이 싫었다. 팽팽한 불안감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이 도시는 그만큼 위험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어딜 가나 보이는 카지노들과 중국어로 적힌 네온사인들이 반짝이며 존재를 과시했지만 뼈대만 남아 방치된 건물들과 밀려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울 수는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뭐가 그렇게 불편했던 걸까.
텅 비어버린 건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찝찝한 동정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리게 된 가난의 모양이 미안하고 아팠던 걸까.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한 어떤 도시의 모습이 이렇게 강렬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