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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켠서 Aug 01. 2022

폭풍 전야

다시, 캄폿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도시, 시아누크빌을 떠나는 날이다.


전날 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먹은 첫 끼에 체했는지 아니면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받아서였는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A도 한숨 자고 일어나자 컨디션이 괜찮아진 듯했다.


어제 부랴부랴 이 숙소로 다시 넘어온 후 짐을 푸니 어느덧 저녁 8시였다.

급하게 예약을 하느라 그 전날 묵었을 때보다 돈은 더 많이 내야 했지만 방은 훨씬 넓고 좋았다. 게다가 바다 쪽으로 난 큼지막한 창문과 넓은 발코니도 있었다. 밤이 다 되어서야 체크인을 했기에 좋은 방에서 길게 휴식을 취할 틈도 없었지만 적어도 마음 편히 잘 수 있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문도 제대로 닫히지 않는 나무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으악 소리가 절로 나왔으니까.

아침이 되니 전날 저녁부터 부슬부슬 내리고 있던 비도 어느덧 그쳐 있었다. 커튼을 걷으니 깨끗이 씻긴 하늘이 얼굴을 내밀었다. 넓게 트인 발코니 너머로 태국만 바다가 보였다. 큼직한 뭉게구름과 바다가 어우러져 파랗게 빛나는 풍경은 솔직히 멋졌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이제 여길 떠나는구나!


우리는 이 여행의 다음 행선지를 위해 어젯밤 늦게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약 7일 정도가 남아있었다. 떠나기 전 이틀은 수도 프놈펜에서 보내기로 했기에 다른 곳을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은 5일뿐이었다.


캄보디아에 오기 전 막연하게 계획했던 대로 정글이 있는 동쪽으로 향할지, 아니면 조금 뜬금없지만 북서쪽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선택할지 고민이 됐다.


캄폿과 시아누크빌을 잇는 험한 도로도 버티기 힘들었는데 정글로 가는 길은 더 거칠고 어려울 거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동쪽에 위치한 정글 몬둘끼리까지 이동하는 데만도 꼬박 이틀이 걸릴 듯했다. 나는 알레르기 때문에 항말라리아제 복용을 중단했기 때문에 말라리아가 걱정되기도 했다.


대신 시아누크빌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국립공원이나 야생동물 보호구역 등 정글 부럽지 않게 멋진 자연을 구경할 만한 곳들이 많은 듯했다. 이제 다시는 어제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기 전에 제대로 된 숙소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찾아봐도 국립공원 주위에는 이렇다 할 숙소가 없는 거다. 그저 엄청나게 외진 곳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뭐가 됐든 캄폿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곳을 떠나야 하고, 떠나지 못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돌보기엔 캄폿이 제격일 것 같았다. 캄폿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처음 캄폿에 방문했을 때 묵었던 호텔에서 또 한 번 머물고 싶었지만 왜인지 이번에는 빈 방이 없어 예약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마음에 쏙 들었던 호텔인지라 아쉬웠다. 우리를 친구처럼 대해줬던 호텔 매니저 코살과도 한 번 더 만나 시아누크빌 여행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다른 호텔을 예약해야 했지만 괜찮았다. 다시 캄폿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한 거니까.


최대한 빨리 이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던 우리는 체크아웃 시간이 되기도 전에 짐을 다 챙기고 숙소를 떠났다. 일단 고속도로에 오르기 전에 밥을 먹어야 했다. 시아누크빌로 오는 길에 스탑오버로 들렀던 카페에  다시 들러 쉬어갈 예정이긴 했지만 캄폿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할 게 뻔했다. 하지만 이곳엔 갈 만한 음식점도 마땅치 않았다. 고민 끝에 우리는 며칠 전 방문했던 쇼핑몰에 있는 버거킹에서 대충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맛은 그저 그랬다. 이틀 전에 먹은 KFC 보다는 나았지만.


식사를 마치고 쇼핑몰 주차장에 세워둔 오토바이에 다시 오르니 거의 열두 시쯤 됐다. 캄폿으로 향하는 길이 얼마나 험할지 알고 있기에 긴장도 됐지만 설렘이 더 컸다. 고속도로에 오르기 전 주유소에 들러 기름도 가득 채웠다.


가능하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은 4번 국도를 다시 달려야 이 도시를 벗어날 수 있다. 게다가 시내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지난번보다 더 긴 시간을 4번 국도 위에서 보내야 한다는 게 부담이었다. 고속도로에 오르자마자 우리 주위를 에워싼 덤프트럭들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시아누크빌 항구와 바로 이어지는 곳이라 더 그런가 보다.


지난번에는 이 도로를 달릴 때 꽤나 겁을 먹었었던 A도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지 속도를 높였다. 헬멧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다른 소리는 듣기 힘들 정도였다.


이미 겪어보았지만서도 4번 국도는 아찔했다. 서로를 추월하며 빠르게 달리는 트럭들과 자동차들 때문에 그 사이를 비집고 달리는 가지각색의 탈 것들이 계속 눈치를 보아야 했는데, 이따금 20톤짜리 덤프트럭이 내 몸과 고작 팔 하나 간격을 두고 달리게 될 때면 무서워서 작게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이제 A의 오토바이 운전 실력이 엄청 늘었다는 게 느껴졌다. 생존을 위한 운전이니 그럴 수밖에.


게다가 4번 국도가 무섭기는 해도 도로 사정은 괜찮기 때문에 비포장 도로를 달릴 때보다 쉬지 않고 빠르게 달리는 게 가능했다. 덕분에 출발한 지 한 시간 반도 지나지 않아 3번 국도로 들어섰고, 지난번 스탑오버로 쉬어갔던 카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왜 더 빨리 그 도시를 떠나지 못했을까?

소파에 기대 쉬고 있던 A가 뜬금없이 혼잣말하듯 내게 물었다.


왜 그랬지? 나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보면 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당시 하고 있던 일 때문에 화상 미팅에 참여해야 했던 것도, A가 개강을 맞이해 온라인으로 대학 수업을 듣기 시작한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이상하기는 했다. 첫날부터 느낀 기이한 분위기와 수상하디 수상한 도시의 모습을 보고 진작에 도망갈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우리도 뭔가에 홀렸던 게 아닐까.


-그러게, 진짜 이상하지. 우리가 자길 떠나지 못하게 그 도시가 계속 주문을 건 것 같아.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A가 허탈한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A도 시아누크빌이 우리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저주를 건 것 같다며 제발 무사히 캄폿에 도착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 캄폿으로 향하는 도로를 달리면서도 또다시 시아누크빌로 돌아가야만 할 다른 이유가 생길 것 같아 조마조마 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과장은 아니었다. 무서웠다. 우리 등 뒤로 멀어져 가는 그 도시가 우리를 끌어당기는 듯한 불안감이 들었다. 이 당시 우리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시아누크빌 주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도로 위에서 트럭 짐칸에 탄 채 시아누크빌 방향으로 향하는 네다섯 명의 관광객들을 마주쳤을 땐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저 덜컹거리는 트럭 뒤에 타고 비포장 도로를 달려왔다면 그것만으로도 고생일 텐데. A도 그 사람들을 봤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들, 캄폿 같은 도시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텐데.


마침내 오토바이가 시아누크빌 주경계를 넘어 캄폿 주 영역으로 들어갔을 때 나와 A는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해방이다!

아스팔트가 벗겨져 붉은 흙이 다 드러나 거칠고 험했던 도로도 캄폿 주로 넘어오자 말끔하게 상태가 좋아졌다.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전보다 빠른 속도로 달렸기 때문인지 세 시간 반 만에 캄폿에 도착했다. A도 나도 점점 이 오토바이 로드 트립에 적응해 가나보다.


캄폿은 우리가 떠났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떠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다니. 다시 이곳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다. 나름 가깝게 위치한 두 도시가 어쩜 이렇게 다른 분위기를 가질 수 있는지 신기했다. 평화로우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캄폿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이게 캄보디아지!


오늘은 시아누크빌을 벗어났다는 걸 축하하며 보내기로 했다. 아침식사 이후로 먹은 게 없었던 우리는 서둘러 붉은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깨끗하게 씻고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식당으로 향했다. 영국에서 먹던 인도 커리 맛과 똑같다며 A도 정말 만족했던 곳이다. 늘어진 오후의 햇살이 도시 위로 해사하게 쏟아지는 모습이 예뻐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키가 작은 건물들, 나른한 바람, 도란도란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여유롭다.


시아누크빌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런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드디어 편안하고 안전한 곳에서 시원한 맥주를 즐길 수 있게 됐다는 것에 건배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아누크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유령도시로 변하기 전까진 그곳도 이렇게 멋졌을 거다.


우리는 오랜만에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배가 엄청나게 불렀는데도 맥주를 더 주문했던 걸 생각하면, 우리 정말 신났었나 보다.


-다시 여행이 시작된 것 같아.

노을에 물들어가는 도시를 눈으로 담던 A가 말했다. 들뜬 표정의 그가 덧붙였다.

-시아누크빌에서는 기분이 진짜 이상했어.


-맞아, 돌아오니 너무 좋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끝낸 우리는 캄폿을 가로지르는 강이 한눈에 보이는 공원으로 나갔다. 강변에서 우리처럼 노을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유난히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이 많이 보였다. 즐겁고,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우리도 그들 틈에 섞여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하늘과 그에 따라 빛나는 강을 구경했다.

서서히 노을이 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주위가 어두워졌다. 이렇게 들어가기 아쉬웠던 우리는 괜찮아 보이는 펍에 들어가 맥주를 한 잔씩 더 마셨다. 시아누크빌 시내를 걸으며 그토록 찾아 헤맸던 곳이 딱 이런 펍이었는데!


며칠 내내 거기서 그 고생을 했는데도 막상 캄폿으로 돌아와 평화를 되찾으니 그것도 다 재밌는 추억이 됐다. 시아누크빌에서 있었던 일들을 곱씹으며 조잘거리던 우리는 긴장이 풀려버린 탓인지 갑자기 엄청난 피곤을 느꼈다. 축하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마음 편히 쉴 시간이었다.


밤이 금세 늦어졌다.

숙소로 돌아온 A는 피곤한지 편도가 부은 것 같다며 목이 따끔거린다고 투덜거렸다.


아, 오랜만에 평화로웠던 이 밤이 앞으로 다가올 폭풍의 예고편이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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