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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켠서 Aug 13. 2022

캄보디아에 온 것을 후회해

세 번째 병원행, 캄폿

A가 코로나에 걸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날 아침에 검사한 진단키트에도 음성이 떴다. 삼 일 전부터 몸 상태가 완벽하게 돌아왔으니 당연했다. 콧물과 재채기 정도를 동반한 몸살로 가볍게 앓고 지나가서인지 A는 별다른 후유증도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가 숙소를 딱 이날까지만 예약해 뒀다는 건데, 여기서 더 머물지 아니면 다른 숙소로 옮겨 그곳에서 내 격리를 마칠지가 고민이었다. 자가격리를 하기에는 이곳이 정말 안성맞춤이었지만 1박 가격이 캄보디아 내 3성급 호텔보다도 비쌌기 때문이었다. 계획했던 것보다 여행이 약 9일이나 더 길어지게 되었으니 불필요한 여행 경비를 아껴야 했다.


다만 비교적 저렴한 호텔이 많은 다른 도시들과 달리 작은 바닷가 마을인 이곳에는 그런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다시 캄폿으로 돌아왔다. 물론 캡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라는 게 주된 이유였지만 이 도시가 우리에게 주는 편안함 때문에 자꾸 돌아오게 되는 것 같았다. 캄폿에서 머무는 건 이 여행에서만 벌써 세 번째였다. 어쩌다 보니 세 번 다 각기 다른 숙소에 묵게 됐다.

언제 아팠냐는 듯 쌩쌩해진 A와 달리 나는 몸이 낫고 있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팠고 낮이 되면 괜찮아지기를 반복했다. 처음 며칠은 밤마다 열이 펄펄 끓더니, 이제는 목이 너무 아팠다. 정말 바늘 덩어리를 계속 삼키는 느낌이랄까. 캄폿으로 넘어온 후에도 잔기침과 인후통에 시달렸다.


그날 새벽, 목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잠에서 깼다. 침을 삼킬 수 조차 없었다. 목도리를 대신해 목에 칭칭 감고 잤던 가디건이 땀으로 흥건했다. 편도가 심각하게 부었는지 정말 찢어질 듯 아팠다.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나 화장실로 가 세면대에 침을 뱉는데 피가 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봤나 싶어 다시 한번 침을 뱉었다. 소량이지만 가래에 섞여 나온 피가 보였다. 그때 깨달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지금 시각은 새벽 다섯 시. 피를 보자마자 덜컥 겁이 났다.

어떻게 이렇게 더 악화되기만 할 수 있지? 왜 낫질 않지?

목이 다 쉬어 본 적은 있어도 목소리를 아예 잃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말을 하려고 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전에 알레르기 때문에 방문했던 병원이 코앞에 있기는 했지만 문이 열려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고통 때문에 물은 고사하고 침도 삼킬 수가 없어 세면대에 계속 뱉어내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참았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A를 깨웠다. 울기 직전의 표정이었을 거다.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아 휴대폰을 이용해 다 글로 적어야 했다.


'나 목이 어제보다 더 아파. 지금 목소리도 안 나오고 아무것도 삼킬 수가 없어.'

'항생제가 다 떨어졌다고 안 먹기 시작해서 더 나빠졌나 봐.'

'아까 침을 뱉었는데 가래에 피가 섞여 있었어.'


내가 적은 걸 보더니 A가 지도 앱을 켜 지금 시간에 열려있는 약국이 있는지 확인했다.  

-제일 일찍 문을 여는 약국도 7시에나 여는 것 같은데. 어떡하지?


이렇게 아파서 자꾸 걱정만 끼치는 것 같아 A에게 미안했다. 내가 다시 손을 움직여 메시지를 썼다.

'내가 너무 미안해.'


-제발 미안해하지 마.

A가 말했다.

-지도에는 병원이 24시라네. 가자.


아침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고 오토바이에 올랐다. 모퉁이 하나만 돌면 병원이었다. 병원 문은 열려 있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계세요? 누구 없어요? A가 큰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이층에서 청소 중이던 아저씨가 내려오더니 크메르어로 우리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A가 고개를 젓자 그가 영어를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불러왔다. 아직 의사 선생님이 안 계신다고 두 시간 후인 8시에 다시 오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나와 다시 오토바이에 올랐는데 A가 혹시 근처 약국이 문을 열었는지 확인해보자며 방향을 틀었다. 바로 앞인 사마키 시장에 문을 열 준비를 하는 약국이 하나 보였다. 오토바이를 세운 A가 나 대신 약국으로 가 항생제가 있는지 물었다. 우여곡절 끝에 내가 원래 먹고 있던 항생제를 샀다.  


이 와중에도 캡에서 캄폿으로 넘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어제 항생제를 사서 먹었더라면 이 사단까지는 나지 않았을 것 같아 후회가 되더라.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항생제를 한 알 삼켰다. 침도 넘어가지 못할 만큼 부어있는 편도에 흰 알약을 쑤셔 넣을 때는 정말 눈물이 찔끔 났다.


드디어 아침 여덟 시다. 한 시간 반을 어떤 정신으로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시간에 맞춰 바로 병원에 갔는데 내 앞에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아 진료 접수도 A가 했다. 어디가 아파서 왔냐는 간호사 언니의 질문에 A가 대신 대답했다. 목이 너무 아프대요. 


내 차례가 될 때까지 의자에 멍하니 앉아 기다리는데 갑자기 극심한 구토감이 몰려왔다. 내가 아는 느낌이었다. 빈속에 센 약을 먹었을 때 느껴지는 메스꺼움이다. 바보, 진짜 바보. 다급하게 A에게 메시지를 썼다.


'나 토할 것 같아. 약 먹기 전에 뭐라도 먹었어야 했는데.'


목은 찢어질 것 같고 머리는 핑핑 도는데 속은 왜 이렇게 안 좋은지, 나는 병원 밖으로 뛰쳐나가 밖에서 헛구역질을 했다. 전날부터 입맛이 없어 먹은 것도 별로 없었던 탓에 나올 것도 없었다. 진료를 보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영원처럼 길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말을 할 수 없는 나를 대신해 A가 의사 선생님께 모든 걸 설명했다.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백신은요? 접종 완료자인가요?

A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2차 접종까지 완료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진료실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나는 거의 빈사상태였다. 열은 37.5도로 그리 높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여기서 항원검사를 받아야 한다며 다시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라는 말로 진료를 마쳤다.


아까처럼 다시 접수대 앞 의자에 앉아 숙취보다 심한 구토감을 간신히 견디고 있는데 갑자기 두 손에서 핏기가 가시더니 손이 차갑다 못해 딱딱해지는 게 느껴졌다. 서서히 손가락들이 기괴한 모양새로 뻣뻣하게 굳어가는 거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겁에 질린 내가 A를 툭툭치고 굳어가는 두 손을 보여줬다. A는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일단 나를 안심시켰다. 사실 이때는 손보다도 토할 것처럼 울렁거리는 속이 더 걱정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의사 선생님이 다시 나를 불렀다. 이번엔 진료실이 아니라 치료실처럼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검사를 위해 침대에 잠시 앉아 달라는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인상을 찌푸릴 대로 찌푸린 나는 침대 옆으로 보이는 싱크대를 붙잡고 몇 초간 헛구역질을 했다. 차라리 뭐라도 뱉어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침대에 앉아 코가 보이게 마스크를 내리는데 오른손도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울상을 지으며 내 뻣뻣하게 굳어져 가는 손을 의사에게 내밀어 보였다.

나는 하나도 안 괜찮은데 도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자꾸 잇츠 오케이를 되풀이하는 그가 답답했다.  


-잠깐 밖에서 기다리세요.

면봉으로 검체를 채취한 뒤 의사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는 먼저 치료실을 나갔다. 손가락은 점점 더 굳어져 움직이지를 않는데 이제는 다리까지 말을 듣지 않았다.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서서 A에게로 가야 하는데. 종아리부터 서서히 굳어가는 게, 힘 빠진 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속도 너무 울렁거렸다. 두 손이 차갑다 못해 시퍼렇게 질려가는게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환자용 침대에 걸터앉아 신음만 내뱉었다.


허벅지를 꼬집고 싶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아 그럴 수도 없었다. 자꾸 시야가 좁아졌다.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좁아지는 시야 주위가 새카맸다. 숨을 쉬자, 숨을.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울음과 호흡이 뒤섞인 숨을 내뱉은 기억이 난다. 그 순간,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 나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순식간에 온몸이 두려움으로 뒤덮였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공포였다. 이건 뭔가 직감에 가까웠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쓰러지면 정말 죽을 수도 있어.


안돼, 안돼요.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지금은 싫어요. 아직은 아니에요.

제발 죽더라도 한국 땅에서 죽게 해달라고 빌었다. 누구에게 빌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죽고 싶지 않다고, 여기서는 아닌 것 같다고 한국어로 웅얼거리며 기도했다.


어느 순간, 돌아가신 할아버지 얼굴이 눈앞에 스치듯 떠올랐다. 감각이 멀어져 가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떻게 그리고 왜, 갑자기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날 지켜주러 오셨나 보다. 어쩌면 내가 할아버지를 간절하게 불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자꾸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불현듯 다리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감싸는 모든 소리들이 귀에서 웅웅 울렸다. 가까스로 일어나 비척거리며 진료실을 나서는데 너무너무 추웠다. 분명 아침부터 섭씨 30도가 넘을 텐데 어깨가 떨릴 만큼 오한이 났다. 접수대 앞에 앉아있던 A가 내가 걸어 나오는 걸 보더니 헐레벌떡 달려와 나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먹을 거 사 올게. 뭐라도 사 올게. 잠깐만 기다려. 응?

마음이 급한지 나를 다그치듯 말을 끝낸 A가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오토바이에 올랐다.


아, 정말 너무 아프다. A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대답을 하지도 못했다. 고개를 떨구고 밭은 숨을 몰아쉴 뿐 정신없는 고통에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더운지도 추운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손을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입고 있는 옷이 다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느껴질 때쯤, 견디기 어려웠던 메스꺼움이 가라앉으면서 마비가 온 듯 기괴하게 굳어있던 손가락들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좁아졌다 넓어졌다를 반복하던 시야도 진정이 됐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데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때 A가 뛰어들어오더니 내게 먹으라며 잼이 발라진 흰 빵이 들어있는 봉지를 뜯어서 내밀었다. 아무리 동네를 돌고 돌아도 바나나를 찾지 못했단다. 시간이 이른지라 열려있는 음식점도 안 보이고, 그나마 이게 가장 부드러운 음식인 것 같아 사 온 거라고.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아 밖에 나가 먹겠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빵을 뜯어 내 입 가까이 가져다 대는 그에게 손을 들어 병원 밖을 가리켰다. A의 부축을 받아 병원 밖으로 나간 후에야 A가 먹여주는 빵을 입으로 받아먹었다. 편도가 심하게 부은 탓에 음식을 제대로 삼키기가 어려웠다. 바늘이 꽂힌 음식을 씹어 삼키는 느낌이었다.

그때 A가 사왔던 빵. 맛있어서 간식으로도 가끔 사 먹었다.

손바닥만한 빵 하나를 어찌어찌 다 먹고 나니 조금 진정이 됐다. 참을 수 없이 울렁거리던 속도 괜찮아졌다. 빈속에 무리해서 항생제를 먹지 말고 좀 더 기다릴 걸 그랬나 보다. 그래도 찢어질 듯 고통스러운 인후통은 그대로였다. 혹시나 다른 병이 생긴 건 아닐까 생각하니 두려움이 가시질 않았다.


신속항원검사 결과가 나왔다. 검사 결과는 당연히 양성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아픈 거라고 했는데 왜 항원검사를 받아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의 절차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의사 선생님 말을 따른 거였다. 간호사 언니가 병원 이름과 의사 선생님 서명이 찍힌 결과지를 봉투에 넣어 넘겨주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나를 대신해 A가 의사 선생님과 대화를 나눴다. 대충 약 잘 먹고 잘 쉬면 금방 나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방금 정말 죽을 뻔했는데 내 증상은 제대로 듣지 않고 이렇게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답답했다. 합병증이 무서웠던 나는 번역기로 '폐렴'을 검색해 그에게 내밀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 노. 이렇게 말한 의사 선생님이 고개를 젓더니 나에게 물었다.

-무서워요?


나는 뭐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반응을 본 의사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엄청 무섭겠지만 괜찮아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백신도 두 번 다 맞았잖아요. 변이 바이러스는 당신처럼 건강하고 어린 사람에게는 위험하지 않아요.


너무 아팠기 때문에 의사 선생님의 말을 백 퍼센트 믿기는 힘들었다. 잘 쉬면 낫는다는데, 나도 코로나에 걸린 지난 5일간 엄청 잘 쉬었단 말이다. 근데 증상이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심해져 버렸으니 무서운 게 당연했다.


나는 그때, 병원 의자에 힘없이 앉아 A와 의사선생님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후회했다. 왜 캄보디아에 왔을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시국에 여기까지 왔을까. 왜 코로나에 걸렸을까. 왜. 왜. 후회와 원망은 어디로 향하지도 못하고 걱정으로 귀결됐다. 여기서 내 상태가 악화된다 하더라도 주위에 다른 병원도 없는데 어떡하지. 며칠 전까지 느꼈던 행복은 처음 겪어보는 아픔에 묻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수납을 하려는데 병원비가 110달러다. 뭘 해줬다고 110달러야? 말도 안 돼. 나 대신 A가 구체적인 항목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항원검사가 15달러, 진료비가 10달러, 진통제가 15달러, 코로나 치료제가 70... 엥?


진통제는 이미 충분히 많으니 굳이 병원에서 받을 필요가 없었다. 검색을 해봤지만 코로나 치료제라는 이 약은 내가 먹어도 되는 게 맞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은 코로나 환자들에게 이 약도 처방이 된다지만 이때 당시에는 아직 한국에서 사용 승인이 나기 전이었다)


간호사 언니는 우리에게 일단 항원검사와 진료비만 계산하고 약 이름을 적어줄 테니 약이 필요하면 약국에서 구하라고 했다.


병원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진료를 보고 항원검사를 했을 뿐 증상은 뭐 하나 좋아진 게 없었다. 목이 찢어질 듯 아파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건 똑같았다. 아픈 건 둘째 치더라도 아무리 애를 써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게 무섭고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거친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아까 새벽에 아파서 깼을 때부터 엄마한테 계속 메시지를 보내 뒀는데, 걱정이 됐는지 전화가 왔다.


지금 내가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냥 듣기만 하라고 하셨다. 휴대폰 너머로 엄마랑 아빠 목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현서야-하고 부르는 소리에 대답도 못한다. 죄송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내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는지 아빠가 괜찮다고 울지 말라고, 코로나가 원래 그렇게 아픈 거라고 나를 달랬다. 그렇지만 한번 터진 눈물이 쉽게 멈추지 않아 나는 전화하는 내내 울었다.


이때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있었기 때문에 도움이 될 만한 약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다. 병원에서 주려고 했던 코로나 치료제 말고 코로나 치료에 쓰이는 항생제를 먹어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엄마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A의 말로는 아까 항원검사를 끝내고 비틀비틀 걸어나오는 내가 너무 하얗게 질려 있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고 한다. 정말 내가 잘못될까봐 걱정했다고, 그래서 바로 뭐라도 먹을 걸 사와야겠다는 생각에 뛰어나간 거라고 했다.


A는 음식과 약을 사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아픈 나 때문에 아침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닌 그 애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내가 여기에 혼자였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지트로마이신 500밀리그램. 1일 1회 1정만 복용하는데, 약이 세서 3일만 복용한다고 한다. 화이자 제약회사에서 제조된 건 지스로맥스. 250밀리그램이라 1회 2정 복용한다


캄보디아에서는 한국처럼 약을 작은 박스에 포장해 팔지 않고 약을 다 낱개로 뜯어준다. 물론 약마다 가격이 다 다르다. 이건 이렇게 알약이 열개 들어있는 한 장(?)이 15000릴이었다. 내게 필요한 건 딱 3알이었지만 나머지는 비상용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엄마 아빠는 자꾸 깨끗하고 좋은 곳에서 묵고 밥도 대충 먹지 말고 잘 챙겨 먹으라고 내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제발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치료에 집중하라는 말을 이날 하루에만 세네 번은 들은 것 같다.


아프면 눈물이 많아지기는 하나보다. 아침부터 병원이며 약국이며 뛰어다닌 남자친구한테 미안해서 울고, 자꾸 부모님을 걱정시키는 게 죄송해서 울고, 죽기 싫어서 울었다. 진짜 못살아.


건강한 것만으로도 나는 다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아프기 전에는 몰랐다. 서울에서의 나는 뭐가 그렇게 부족했던 걸까. 한 번 잃어보고 나니, 건강만 한 게 없다.


이날 나는 일기에 짤막하게 이런 문장을 적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바라는 거 없어. 나 건강한 거만 바라.


병원의 환자용 침대에 앉아 내가 살기만을 간절히 바랬던 그날의 나를 떠올린다.


막상 다시 건강을 얻고 나니 또 욕심이 많아지지만 그때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간절함으로 지금의 나를 바랐던 건지 계속 곱씹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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