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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켠서 Sep 06. 2022

불안이 현실이 될 때

우당탕탕, 프놈펜

우리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캄퐁톰에서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다시 프놈펜으로 돌아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A가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온라인 강의를 듣는 동안 나는 짐을 싸고 체크아웃을 할 준비를 했다. 이제 정말 길고 길었던 이 여행이 끝나가나 싶으면서도 지난주에 그렇게 아팠던 내가 PCR 음성 확인서를 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 마음이 뒤숭숭했다. 프놈펜으로 떠날 준비를 다 마친 후 방을 나서기 전에 어제 약국에서 구매한 코로나 자가진단키트를 써봤다.

선명한 한 줄이 떴음에도 괜히 불안했다.


A와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고 캄보디아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도 이번 여행에서는 마지막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참 섭섭하기도 했다.

-우리 이제 내일 아침에 PCR 검사받고 음성이면 한국 갈 수 있는 거네.

내가 이렇게 말하자 A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뱉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드디어 간다.


처음 비행기를 미뤘을 때만 해도 캄보디아에 더 있을 수 있다며 은근히 신나 했던 A도 길어진 여행에 지치긴 지쳤는지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계획보다 열흘 가까이 길어진 여행에 아직 회복되지 않은 체력까지, 이젠 떠돌아다니는 이 로드트립을 청산하고 마음 편히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에서 쉬고 싶었다.


우리는 딱 열두 시에 맞춰 체크아웃을 마치고 오토바이에 올랐다. 오며 가며 얼굴을 익혔던 주차장 직원들에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아꾼! (고마워요!)

오늘도 체감온도는 40도가 넘는다. 호텔을 빠져나온 우리는 물을 사기 위해 시내 외곽 마트에 잠깐 들른 후 6번 국도에 올랐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지루하기만 했던 이 도로도 뭔가 감회가 좀 달랐달까. 물론 그렇게 익숙해졌던 로드트립인데도 아찔한 상황은 끊이질 않았다.


-어, 뭐야? 야! 앞을 보고 운전해야지!

6번 국도만 세 시간가량 쭉 따라 내려가면 프놈펜인 데다가 도로가 꽤 한적해 평화롭게 속도를 높여 운전 중이었던 A가 크게 핸들을 틀더니 뒤쪽을 보며 소리를 쳤다.


-뭐야, 무슨 일이야?

우리가 어디쯤 왔나 확인하려고 잠깐 지도 앱에 한눈을 판 사이 벌어진 일에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A에게 물었다.


-우리 방금 저 애랑 부딪힐 뻔했어!

많이 놀랐는지 A가 짐짓 화가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황을 들어보니 이랬다.


바로 앞 오른쪽 갓길로 열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오토바이 위에 혼자 타고 있는 걸 봤는데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가려는 건지 오토바이 헤드를 도로 방향으로 세워두고 핸들을 잡고 있었다고 한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던 A는 그 애가 당연히 양 옆을 살필 거라고 생각해 속도를 줄이지 않았는데 우리가 딱 그 남자애 앞을 지나려는 순간, 그 애가 옆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고속도로로 돌진해 온 것이었다.    


A가 순발력이 좋아 운 좋게 사고를 면할 수 있었지만 정말 그 오토바이와 부딪히기라도 했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특히 나는 뒤에 탄 채 15킬로나 되는 배낭을 메고 있었기에 더 위험했을 거다. 이 나라에서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걸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마는 이렇게 부주의하거나 신호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늘 조심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오토바이를 탈 거면 적어도 양 옆은 살펴야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지 A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렇게 어린애가 면허가 있을 리 만무하긴 했지만 자칫하면 우리까지 큰 사고에 휘말릴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 뒤, 이번엔 A가 기름이 다 떨어졌다며 기름 게이지가 0에 가까운 연료 계기판을 가리켰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우리는 당황스러웠지만 오는 길 내내 주유소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곧 또 나올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가도 가도 주유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주유소가 어디야?

계기판을 보며 마음이 급해졌는지 A가 물었다. 검색해보니 10분은 더 가야 한다. 하도 많은 주유소를 지나쳐 오느라 여기는 주유소가 왜 이렇게 많지 싶었는데, 역시 꼭 필요할 때는 보이지가 않는다.


A가 계기판 좀 보라며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새 화살표가 0보다 한참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늘 미리미리 기름을 채워뒀던 우리라 이런 일은 또 처음이었다. 유리병이나 페트병에 싸구려 휘발유를 넣어서 파는 노점들 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오토바이가 멈추게 되면 둘이 같이 밀고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재밌을 것 같았다. 장담하건대 A도 분명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다행히 오토바이는 주유소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달려주었고 고속도로를 걸어갈 필요가 없어진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연료탱크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이번에는 스탑오버 없이 쉬지 않고 프놈펜으로 바로 직진했기에 우리는 출발한 지 세 시간 반 만에 프놈펜 시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날을 거듭할수록 쑥쑥 늘어가는 A의 운전실력이 신기했다. 이렇게 험난할 줄 몰랐던 캄보디아 로드트립도 정말 막바지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아쉽기도 했지만 당장 내일 아침에 받아야 할 PCR 검사 때문에 긴장되는 마음이 훨씬 더 컸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로드트립이 고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고생을 하려고 여행을 떠난 건 아니었는데. 이때쯤 되니 A도 나도 심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다. 정말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한국이 그리웠다.

그래도 캄보디아에서의 마지막 며칠이라니까 좋은 숙소에서 묵으며 이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어플을 이용해 열심히 찾다 보니 운 좋게도 4성급 호텔을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에 예약할 수 있었다. 평소보다 1박에 15달러 정도를 더 주고 예약한 건데 조식이 포함된 가격이라 이틀간 아침 걱정은 안 해도 되니 오히려 좋다. 객실 중에서는 제일 높은 층이라 전망도 좋았고 무엇보다 방이 정말 널찍했는데, 유난히 고풍스러운 가구들 때문에 박물관에 있는 느낌이었다.



제일 좋았던 건, 다음날 아침 내가 PCR 검사를 받으러 가야 하는 '인터케어 메디컬 센터(Intercare Medical Center)'가 오토바이로 고작 1분 거리, 그러니까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다는 점이었다. A가 검사를 받아야 하는 '파스퇴르 연구소(Institut Pasteur du Cambodge)'로부터는 10분 정도 떨어진 곳이지만 신청한 예약이 받아들여졌으니 시간에 맞춰가면 되는 A와 달리 예약을 거절당한 나는 당일 아침에 검사 장소에 가서 기다려야 한다.


아직까지도 그 예약 건 때문에 심통이 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저렴한 가격에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묵게 되었으니 좋은 것만 생각해야지. 사실 학생인 우리에게 실제 캄보디아 물가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저렴하지는 않았지만 숙박비를 생각하면 정말 가성비 좋은 여행지임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이날 저녁을 먹기 위해 'KIMMO'라는 한국 라면 분식점에 방문했다. 한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하다가 찾아본 곳이었다. 양식도 싫고, 캄보디아 음식도 질린다고 징징대면서도 프놈펜에 있는 한식당을 검색해보니 생각보다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 선뜻 내키지 않았는데, 캄보디아 프랜차이즈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한식을 맛볼 수 있는 체인점을 찾았다.


메뉴에는 다양한 종류의 한국식 라면, 볶음 라면, 비빔밥 등이 있었다. 딱 저녁 시간대라 그런지 식당 안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나랑 A만 외국인인 것 같았는데, 이렇게 많은 현지 사람들이 한국식 라면을 즐겨 먹는다는 사실이 확실히 놀라웠다. 신발을 벗고 올라서야 하는 낮은 테이블 자리를 배정받은 우리는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사라져 가는 추세라지만, 이렇게 바닥에 앉아서 먹는 방식이 꽤나 한식당답다.

나는 오징어와 김치가 들어간 라면을, A는 볶음 라면을 주문했다. 음료도 맛있었고 음식에 김치가 들어가 있다는 게 무엇보다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쌀밥이 너무 먹고 싶었다. PCR 검사에서 음성만 나온다면 곧 한국에 가는 건데, 그러면 마음껏 한식도 먹을 수 있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밥을 먹고 마트에 들렀다 돌아와서 루프탑에 있는 수영장에서 노는 동안에도 마음 한편에 있는 불안감이 씻겨지지가 않았다. 만약에 여기서 양성이 떠 버리면 비행기를 열흘 뒤로 미뤄야 한다. 빨리 출국하고 싶어도 언제 확실히 음성이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자가 만료되기 때문에 여행비자도 연장을 받아야 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정말 양성이 떴다고 시설에 격리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 가득 걱정만 안고 다음날이 됐다. 지난주와 이번 주 내내 마음을 예민하게 했던 불안이 현실이 될지, 확인하는 날이다.


도대체 한국에 언제 돌아오냐는 친구들에게 PCR 검사에서 음성이 뜨면 이틀 후에 출국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검사를 받으러 갈 준비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글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목이 아릴 정도였다.


A의 검사가 8시로 예정돼 있기 때문에 그전에 내가 검사받을 병원에 나를 내려주고 오토바이를 주차한 뒤 A는 툭툭을 불러 검사장소로 이동하기로 했다. 프놈펜 시내가 복잡한데 뒤에 내가 타고 있지 않으면 지도를 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A에게 왕복 툭툭 비용과 80달러를 건네준 뒤 나도 사람들 검사를 받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며칠 전 오후에 왔을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검사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지레 겁을 먹는 바람에 서명을 하지 못했던 동의서에도 오늘 날짜와 함께 서명을 적어 넣었다.


오전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가 있었는데, 인터케어 메디컬 센터는 오전 7시 반부터 9시 반 사이에 검사를 받은 경우 당일 오후에 PCR 검사지를 발급해주기 때문이었다. A가 검사를 받은 파스퇴르 연구소는 익일에 결과가 나온다.


뒷장을 넘기니 현재 몸 상태에 관한 여러 항목들과 백신 접종일자, 그리고 혹시 코로나에 걸렸다면 언제 걸렸는지를 묻는 칸이 있다. 기다리면서 검사 신청서를 다 작성하고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며 여권 확인과 수납을 완료했다.


그리고 드디어 검사를 받았다.

목은 물론이고 양쪽 콧구멍까지 죄다 쑤셔진 탓에 얼굴이 다 얼얼했다. 약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렸다가 검사를 받아야 했던 나와 달리 정해진 시간에 가서 빠르게 검사만 받고 온 A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사가 어땠냐는 A의 물음에 엄청 꼼꼼했다고 대답하자 A는 자기가 검사를 받은 곳에서는 한쪽 콧구멍에만 면봉을 살짝 넣어 검사했다며 내가 그곳에서 받았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호텔로 돌아가니 고작 오전 9시가 조금 넘었다. 혹시나 양성이 뜰까 봐 초조한 마음으로 조식을 먹고 이 여행의 마지막에 가려고 남겨두었던 '뚜얼 슬랭(Tuol Sleng) 대학살 박물관'에 갈 채비를 했다.


뚜얼 슬랭 박물관은 캄보디아의 아픈 역사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크메르 루주 정권의 정치범 수용소였던 이곳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심문하는 감옥으로 쓰였다. 4년이 채 안 되는 크메르 루주의 집권 동안 캄보디아 인구의 25퍼센트에 달했던 170만에서 200만 명이 희생당했고 1978년 12월,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크메르 루주 정권은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고작 44년이 흘렀다.


사실 캄보디아에 오기 전까지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 조차 알지 못했다. 여행을 함으로써 이렇게 배우며 내 세계를 넓혀가는 것이 여행을 끊지 못하는 이유겠지.


이곳처럼 캄보디아의 슬프고 어두운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킬링필드(Killing Fields)'에도 방문하고 싶었지만 시내에서 거리가 꽤 되는 바람에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뚜얼 슬랭 박물관 입장료는 오디오 미포함 어른 5달러다. 오디오 포함 가격은 8달러인데, 우리는 그냥 오디오를 포함하지 않는 표로 구매했다. 보니까 한국어도 지원되는 오디오던데, 입장해서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오디오를 포함할 걸 하고 잔뜩 후회했다. 박물관이라고는 하지만 과거에 수용소였기 때문에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자 설명 같은 걸 자세히 달아두지 않은 방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오디오가 있었더라면 더 깊게 이곳을 둘러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A도 나도 숙연한 태도로 아픈 역사의 흔적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고문 기구와 옷가지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모습에 마음이 무겁고 아팠다. 당시 이곳 수용소에 끌려왔던 무고한 시민들의 사진이 걸려있는 곳에서는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사진 속 그들의 표정이 읽히지 않는다. 눈시울이 자꾸 시큰거렸다.


약 한 시간 정도 박물관을 돌아본 우리는 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시켜두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점심을 먹은 뒤에 지난번에 방문했던 '칩몽 노로 몰(Chip Mong Noro Mall)'에서 한국 아이스크림을 산 뒤 호텔로 돌아왔다. 3월 중순에서 끝으로 향해가니 이제는 밖에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더위다.


샤워를 하고 잠깐 쉬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보이스톡도 아니고 캄보디아에서 전화가 걸려온 건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뭔가 느낌이 왔다.


-여보세요?

영어로 전화를 받자 친절하고 투박한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내 이름을 읽으며 본인이 맞는지를 물었다.


-네, 맞아요.

-오늘 인터케어 메디컬 센터에서 PCR 검사받으셨죠?

-네.


아, 예감이 안 좋다.


-출국용으로 PCR 받으셨는데...... 어떡하죠. 양성이 떠 버렸어요.


역시. 불안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당장 비행기며 비자며 또다시 해결해야 할 여러 문제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올랐다.


내가 안타까운지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코로나에 걸렸었고 그 뒤로 시간이 충분히 지났기 때문에 격리는 따로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 그런가요?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다행이다.


-네, 그렇지만...... 출국은 못하게 됐네요. 어떡하죠. 아쉽겠어요.

오히려 전화를 걸어준 병원 직원이 나를 더 걱정해주는 바람에 살짝 위로가 됐다.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검사 결과 수령은 가능한 거 맞죠?


10일 전에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공식 서류를 가지고 한국으로 출국하려면 PCR 양성 확인서가 꼭 필요했기에 직원에게 한번 더 확인했다.

-그럼요, 저녁 여섯 시쯤 '올림피아 메디컬 허브(Olympia Medical Hub)' 로비에서 받아가시면 돼요.


전화를 끊고 A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A에게는 청천벽력이었을 거다. 물론 나에게도 그랬다. 캄퐁톰에서만 해도 우리 둘 다 로드트립에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는 이야기를 했기에 어서 편리한 모든 게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는데.


-너...... 가고 싶으면 먼저 돌아갈래? 열흘 정도야, 혼자 있을 수 있어.

나 때문에 이곳에 더 남아야 하는 게 미안하기도 했고 혼자서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물어본 거였다. 이렇게 말하는 내게 A가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너를 혼자 두고 가! 너는 내 여자 친구인데! 물론 네가 가족이든 친구든 그거는 정말 도덕적으로도 옳지 못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가 덧붙였다.

-열흘 동안 어떻게 할지, 비자랑 다 생각해보자.


바로 엄마에게도 연락했다. 지난번처럼 한국에 있는 엄마가 항공사에 바로 연락을 취해주셨고 다행히 상황을 들은 항공사에서 수수료 없이 바로 티켓을 열흘 뒤인 11일째 되는 날로 바꿔주었다. 21일 새벽으로 예정되어 있던 한국으로의 출국은, 그렇게 밀리고 밀려 29일 새벽이 되어버렸다. 막막했다.


열흘 동안 뭘 하지? 이렇게 여행이 길어져도 되나? 비자는? 내일 반납하기로 한 오토바이는?


저녁을 먹으러 나갈 겸 PCR 검사 센터 바로 옆에 있는 병원에 들러 양성 확인서를 받아왔다. 서류봉투에 든 검사 결과지를 나누어 주시는 경비 아저씨가 내 이름을 듣더니 봉투 위쪽에 적힌 이름들을 확인했다. 이름 옆에 양성이라는 표시가 작게 되어 있었다. 그걸 본 그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다.

-비행기 못 타는 거에요?

-네, 그렇게 됐네요. 걸린지는 이미 열흘이 넘었지만요.


내 대답에 그가 나를 위로하며 다 괜찮을 거라고 말을 건넨다. 모르는 사람의 그런 따듯한 말 한마디가 나는 너무 고마웠다. 아직도 이렇게 기억하는 걸 보니 정말 감동받았나 보다.


저녁을 먹고 돌아온 나는 기분이 마냥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그렇게나 아팠다가 이제야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누적된 걱정과 불안이 현실이 되어버리자 예민함이 폭발했다. 속상한 마음에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건강하기만 하면 된 거라고, 괜찮으니 더 잘 쉬고 오라고. 아빠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보고 싶다며 사랑한다는 아빠의 한마디가 내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지를 느끼게 해 줬다. 이렇게 오히려 엄마도 아빠도 더 길어진 이 여행을 즐기라고 말해주시는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도 내가 더 사랑한다는 말을 전한다.


생각해보니 딱 지난주 이날, 몸 상태가 엄청나게 안 좋아지는 바람에 캄폿에서 병원에 갔었다. 정말 아팠었고 바라는 게 건강한 것 밖에 없었던 그날의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생각났다. 그래. 다른 건 다 해결하면 돼.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출국 전에 비자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거다.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열흘을 어떻게 보낼지 막막했지만 다 잘될 거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루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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