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ybag 안에 투명한 감정
어떤 유명한 화가가 한 말이다. 보고 똑같이 그리는 것이 미술인줄 알았던 왕 무식쟁이가 추상이란 것을 접하게 되고 추상작품을 하게 된 것은 내 삶의 귀한 경험이었다. 사실 내 감정의 소용돌이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에 서툴렀기도 했지만 그만큼 갇힌 감정들이 절대절명의 라인 위에서 곡예를 탓을 수도 있었겠다. 모든 것들이 늘 70-80점 사이에서 오가는 내 인생이었기에, 그나마 낙제점은 아니니 다행이었지만,내 맘대로 휘둘러서 90점 이상 될 수 있는 것은 작업을 할 때뿐이었다. 90점 이상도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그저 혼자서 작업할 때 내 감정에게 주고 싶은 고마움의 표시일 뿐이다.
내 앞에 벌어지는 상황들에 대해 감정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전혀 몰랐던 나에게 추상은 유일하게 내 감정을 자유롭게 뱉어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일기처럼 숨겨 놓지 않아도 되는, 그러나 보여줘도 되는 나만 알 수 있는 내 감정의 추상 덩어리로. 물론 내 그림에 대해서 설명을 하긴 하지만, 과연 보는 사람이 나와 동일하게 느껴줄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다. 때로는 내가 가졌던 감정들을 당신들이 어찌 알까?라는 오만도 있긴 하지만 보는 이 들을 통해 또 다른 나의 감정을 유추해 가는 경험은 흥미롭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작업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사물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린다. 내 추상 속에 숨어있던 것들이 이제는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다차원의 추상으로만 표현될 수 있었던 것들이 서서히 표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다차원 안에서 엉켜 저 있던 무채색의 그림자 같은 감정들은 시간이라는 위대한 해탈을 지나며 서서히 듬성듬성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삶은 의미가 천 가지 만 가지 있다지만 사는 게 누구에게나 고만고만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나름의 긍정적인 성찰이기도 하다.
다차원을 뚫고 지금의 세상으로 나오는 길에 조그만 goodybag을 끼고 나왔다. Goodybag 속에는 그저 사람들을 가여워하는 투명한 감정이 들어 있었다. '인간' 들이 가지고 있는 본성 : 이기심, 탐욕, 증오, 폭력, 질투 등 추한 본성의 촘촘한 스펙트럼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인간'이라는 종. 그 종을 가여워하라고 다차원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goodybag을 손에 쥐어 준 것 같다.
그래서...
내 그림 안에 평범한 인간 '우리" 들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그들의 본성이 어떻든지 우리는 ‘우리’의 가여움을 서로 어루만질 필요가 있다. 나를 다차원으로 몰아넣었던 사람들도 가여운 ‘우리’ 들이고 끄집어 내 준 사람들도 모두 가여운 ‘우리’ 들이다. 어떤 차원에서든 함께 했던 모든 우리들이 가여울 뿐이다. 평범하게 가여운 ‘우리들’! 이제는 나를 스치는 그 많은 '우리' 들을 내 그림 안으로 데려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