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봉익동 xx 번지
가난이야 봄철 산등성이 아지랑이 같다던가. 그 시절 모두가 그렇다지만 가난은 우리에게 여름 소낙비 같았다. 정말 봉익동 xx번지는 떠나고 싶지 않았었다.
재개발 때문이라지만 결국은 마지막까지 버티다 떠나는 몇 안 되는 집들 중에 하나였다.
입 밖으로 내지 못했지만 결국은 가난도 포함되었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으니까.
(이미지 출처 : 서울 문화재단)
운동화를 말리려다 한 짝을 누렇게 태웠던 연탄아궁이가 있었다.
어두우면 무서워서 못 올라가지만 오빠와 싸우고 속상하면 몰래 올라가 울던 다락방도 있었다. 그 다락방에는 할머니께서 숨겨두고 당신과 유일한 손자, 오빠한테만 주던 경옥고도 있었다.
할머니께서 깨를 볶을 때면 언니 오빠와 함께 앉아서 깨 볶은 그릇에 밥을 비벼 한주먹씩 먹던 툇마루는 나무 쪽판 하나가 비뚤어져서 우리 형제들은 그곳을 피해 앉으려고 서로 엉덩이를 밀쳤었다.
연탄가스가 스며들지 않도록 아무렇게나 종이를 오려서 덕지덕지 붙였던 살이 하나 꺾어진 창호지문은 그렇게 보기 나쁘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수돗물을 드러나서 "오늘은 절대 안나갓!" 하면서도 막내라는 직책(?)때문에 결국은 수돗물을 잠그고 왔던 녹슨 수돗가옆에서 아침마다 언니와 함께 이빨을 닦았다.
크고 작은 항아리가 몇 개 자리 잡은 할머니의 전용 공간 장독대는 늘 햇빛에 반짝거렸다.
달걀귀신 이야기, 피 묻은 빗자루 이야기 때문에 해가지면 절대 안 가려고 저항한 허름한 변소도 그 반짝이는 장독대 옆에 있었다.
재봉틀 소리, 라디오 연속극 소리와 함께 각양각색의 천들이 어우러진 엄마의 한복 짓는 사랑방은 동네 아줌아들의 웃음소리로 그득했다.
할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결국 작은 아버지 집으로 가실 때 말없이 넘던 문지방은 아버지의 관을 넘겼던 문지방이기도 하다.
이사하는 날. 새벽 공기가 그리 맑지는 않았다.
자가용 한 대가 더러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사람을 내려놓으려고 멈추는 것을 보았다.
자가용에서 내리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 어지간히 느린 동작으로 문을 열고 내려오는데 그런 행동만으로도 저렇듯 풍요로움을 나타낼 수 있다니 경의로왔다. 짐 지키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사춘기 여자애는 눈앞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맑지 못한 공기가 짓눌러 있어서가 아니라 아마도 그 여자애의 눈에 뭔가가 자꾸 뻑뻑하게 메워져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지 출처 : 중앙일보)
정말 봉익동 xx 번지는 떠나고 싶지 않았었다.
내 안에 두껍게 깔려있는 그리움의 내의, 하지만 따뜻한 내의. 그 따뜻한 내의 때문에 아수라 같은 세상 속에서 난 춥지 않게 60이 넘는 세월을 따라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