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감수성, 지적 호기심 그리고 열정
내년 2월이면 Medicare 혜택을 받는다. 미국에서 Medicare 혜택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senior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대부분 활인(?)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의료혜택도 많은 혜택을 볼 수가 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하고 세금 낸 것에 대해 시민으로서 생활의 보호(?)를 해준다는 것이다. 육십 고개를 넘을 때는 세상이 역병천지라서 고개를 넘은 건지 내려온 건지 모르게 지났다. 육십을 지나 이제 공식적으로 senior가 된다니까 뭔가 감정과 감각이 나긋나긋해진다. 공식적인 의무에서 끝난 것 같기도 하고, 노년이라는 새로운 시대(?) 대한 기대에 흥분되기도 하고, 과연 그 노인 시대에 나는 어떤 노인으로 살아갈 것인지 궁금증이 불쑥거린다.
19살 때쯤 이였으리라.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다방에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했다. 모두들 나를 쳐다볼 것 같은 불안감과 왠지 모를 창피 때문에 다방 문밖에서 기다렸던 서울 촌닭 여자애였다. 그 후 나 좋아한다는 어른(?) 남자를 만나서 뭣도 모르고 간 시집이란 세계, 그 세계는 공포와 분노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살아내야만 했다. 먼 나라 이웃나라인 미국으로의 새 정착지 결정은 비록 노동의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 여자애가 자신을 돌아보기에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되었다. 책은 왜 읽어야 하는지, 꿈은 왜 가져야 하는지, 삶 안에서의 선택은 왜 해야 하는지, 열정은 왜 가져야 하는지, 인간관계는 무엇인지... 등등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느끼며 긴 실타래를 잡고 왔더니 어느 순간 할머니라 불리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할머니라 불리기에는...이라고 말하지만, 난 그 할머니란 단어가 좋다. 할머니라는 단어는 단순히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 일뿐이지만 할머니란 존재는 늘 편안한, 늘 내편 같은 그리고 때론 맘먹고 응석 부려도 되는 그런 존재 아닌가. 모두에게 그런 편안한 존재가 되고 싶다.
내가 원하는 영적 감수성은 세상을 인지하는 감각들이 잠들지 않고 늘 내 안에서 공명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 공명으로 인해 더 이상 삶의 공허함에 빠지지 않고 매 순간 남은 생의 시간을 수용하고 신뢰하려 한다. 매일매일의 작은 일들이 모여 삶이 된다. 작고 사소한 일들 속에서 웃음과 위로를 만들 수 있는 감수성이 오래도록 내 가슴에 머물러 주었으며 한다. 그리하여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 길거리 밴드와 함께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는 할머니, 그리고 둥이들이 좀 더 자라면 씨름을 하자고 으르는 천방지축 할머니가 되련다.
지적 호기심을 채워본 적이 없다. 배움은 끝이 없다지만 그리고 어차피 다 알고 갈 수 없는 세상일이긴 하지만 모른 것 투성이라 배우려는 마음을 놓지 않겠다. 그렇다고 어떤 특정 분야에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이 세상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지적 호기심은 꼭 필요하다. 한 사람이 책을 쓰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면 나는 그 사람의 일생도 함께 산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 사람의 일생을 고맙게도 한 권의 책으로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행운이다. 게다가 배우는 즐거움은 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과 노닥거릴 생각을 하니 다가올 노년의 시간은 즐거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삶 속에서의 열정은 그야말로 명랑한 할머니로 가는 지름길이다. 여태껏 끈기라는 열정으로 무턱대고 살아왔다. 화분 속에 숨겨둔 쌈짓돈으로 지금의 평온한 생활을 이룰 때까지 삶에 대한 선명한 열정이 없었다면 세상에 굴복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 선명한 열정은 오로지 내 안의 온도이어서 늘 환한 적정선을 유지했으므로 세상 시선에 좌지우지당하지 않고 웃었다. 내 앞에 다가오는 모든 세상일에 정성을 다하며 살았다. 정성을 다함에 대한 내 삶의 신뢰 때문에 욕을 먹어도 그 욕은 내 가슴을 찌르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의 과정들과 웃음은 그 선명한 열정 때문이었다. 웃음을 되찾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웃음을 잃고 싶지 않다. 열정을 멀리해서 나의 삶을 살지 않고 목숨만을 살게 되는 웃음 잃은 할머니는 안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