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차가 모자를 벗었어
내년이면 일흔을 바라보는 아빠는 입버릇처럼 ‘일흔까지는 일 해야지’ 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 몸도 예전 같지 않고 평생 운전을 해온지라 허리도 많이 안 좋아졌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새벽 다섯 시면 눈을 뜨고 남들이 출근 준비를 하는 보통의 그 시간보다 더 이르게 출근을 해서 저녁 먹을 시간이면 퇴근을 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그런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택시를 팔았다고 했다.
나에겐 갑자기였지만 사실 아빠에겐 버거웠을 테고 또 더 이상은 힘에 부쳤을 거고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일 거다. 엄마에게 이야기를 듣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너머 아빠의 목소리는 시원함보다는 섭섭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뭔가 모를 울컥함에 아빠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말하고는 눈물이 날 것 같아 괜히 더 씩씩한 목소리로 엉뚱한 소리만 하다 전화를 끊었다.
아빠가 택시 일을 시작한 건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니 25년 이상을 택시기사로 살아왔다.
가끔 나의 욱하는 성격과 급한 성격의 뿌리는 아빠라며 아빠를 원망한 적도 많지만 이러한 것과는 별개로 아빠는 정말 책임감 강하고 성실한 분인 것만으로 정말 존경스럽다.
어릴 적 철없는 생각에 개인택시를 하면 내가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놀고 싶음 놀면 그만인데 꾸준히 규칙적으로 일을 해내는 아빠가 너무나 대단했다.
아빠가 어떻게 운행하는지와는 무관하게 택시기사라는 직업이 사실 인식이 안 좋기도 하고 그저 대놓고 까내리는 사람도 많아서 내심 속상할 때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아빠는 소위 남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님에 감사하고 또 자랑스럽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야말로 길에서 아빠 차가 지나가면 친구가 옆에 있건 말건 아빠!!!! 하고 외치며 아빠 차를 쫓아갔다. 그럼 멈춰 서서 내게 돈 몇 푼을 쥐어줬고 그 길로 슈퍼에 가 군것질을 하곤 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보다 먼저 연락하는 것도 아빠였다. 내가 배드민턴을 치다 팔이 부러졌을 때도 어딘가에 가게 될 일이 갑자기 생길 때도.
우산 없이 학교에 갔다 비가 오던 날 그냥 비를 맞고 뛰어오는 날도 많았지만 종종 우산을 가지고 와줬던 아빠의 모습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야말로 아빠는 내게 슈퍼맨이었다.
아빠의 택시는 아빠의 일터이기도 했지만 내 많은 추억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여전히 지금도 나는 길을 다닐 때 택시를 보면 차 번호를 보곤 한다. 혹시 아빠 차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일을 하며 역에서 자주 택시를 타곤 했는데 아빠 차를 종종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면 그날 내 택시비는 굳는 운 좋은 날이었다.
어딜 가든 차 번호를 보는 게 일종의 재미였던 것 같기도 하다. 매일 보는 아빠였지만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반가움이 있었다.
이제는 길거리에서 그 번호를 본다면 그건 우리 아빠의 택시가 아니겠지만 아빠가 20년 넘게 유지한 그 번호가 누군가에게 갔으니 그분께도 행복만 가득한 운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빠의 퇴직을 축하하며 파티도 하고 오빠네와 함께 나름 거금을 들여 안마의자를 선물했다.
케이크와 꽃다발을 받고는 공무원 퇴임식 같다며 약간은 쑥스럽고 어색한 듯 축하를 받았지만 마음 같아선 더 한 것들 더 많이 해드리고픈 마음이 크다.
아빠의 젊은 날 다 바쳐 우리 가족을 위해 사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고생 많았고 이제껏 아빠가 우리의 버팀목으로 살아온 이 세월 정말 고맙고 존경한다고 자주 말씀드려야겠다.
이제 남은 인생은 우리가 아빠의 버팀목이 되겠다고.
아직 어린 내 아이에게 퇴직 파티가 뭔지 설명할 길이 없어 할아버지 차가 이제는 모자를 벗었다고 이야기해주었는데, 그 모자로 평생 우리를 위해 살았으니 앞으로 남은 인생은 내가 아빠의 모자가 되어줄 수 있길, 내가 꼭 그럴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