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DEC23
제주에 다녀왔다. 급하게 좌석을 예약했는데, 비행기에 타고나서 생각하니 제주는 무려 10여 년 만이다.
지난 10여 년 간, 여행이나 휴가가 아니라 잠깐의 출장으로도 제주에 갈 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갔을 때가 떠올랐다. 렌터카를 빌렸지만 일정상 제주 해안 도로를 시원하게 달려보지도 못하고 돌아왔었다. 그 후에는 일부러 찾을 일이 생겨주질 않았다.
마침 겨울비가 내리고 있으니, 비행기가 조금은 흔들리겠다 싶었다. 비도 오는데 꼭 가야할까, 괜한 걸음을 하는 것일까, 잠깐 생각했다.
이륙하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 공항의 직원들이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이 보였지만 빗물 때문에 시야는 이내 흐려졌다.
다음 순간 나의 비행기는 비구름을 뚫고 창공을 향해 내달렸다. ‘흐린 안개와 비구름도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앞으로 한걸음 나아갈 수는 있다'라고 했던 의수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이 말을 오랫동안 이메일 꼬리말로 써 두었었다.
그렇게 반쯤 흐린 하늘을 보며 딴생각을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구름 위에 올라 와 있다. 이제 하얀 구름이 반, 그 너머로 파아란 하늘이 펼쳐져 있다. 땅 위에서 비를 맞으며 우산을 챙겨 들고 공항으로 들어섰는데 몇 분 만에 맑고 파란 하늘을 만나고 있다니.
우리는 하루하루, 일희일비하며 살아간다. 구름 끼고 비바람 치고 태풍에 우산이 찢기는 것만 같은 괴로운 삶의 이야기들은 어쩌면, 저 멀리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은빛 기다란 스펙트럼 위에 찍힌 자잘한 흠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자동차 강판 위에 점으로 찍힌 틴트처럼 그저 하찮은 것일지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와 같은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조용하고 경건하고 그리고 덤덤하게 겨울날의 비구름에 대처하는 자세도 필요하리라.
사실 오늘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몇 달 전 타계하신 스승님의 친구분들을 잠깐 뵙고 왔다. 고등학교 동창이신 그분들이 멀리서 스승님이 살던 집을 찾아와 주셨다. 언제 또 뵐지 알 수 없으니 배웅이라도 해 드리고 싶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오신 어른들께 '저 지금 바로 제주도에 가야 합니다. 바빠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늦으면, 그냥 나는 '오만하게', 제주 쪽에, 늦는다고 기별을 할 참이었다.
모두가 바빠지는 연말이지만, 아무 이해관계없이, 그리운 친구를 보러 와 주시는 어른들의 마음, 그 마음이 나의 사소한 제주행 용건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고, 오늘 아침 나의 뇌는 그렇게 우선순위를 두었던 것 같다, 아주 본능적이고 직관적으로.
스승의 친구분들은 기차를 타실 예정이어서 나는 역으로 먼저 갔다가 바로 공항으로 날아야 했다. 다행히, 비행기는 탑승이 몇 분 지연되었으므로 늦지는 않았다. 숨가쁘게 자리를 찾아 앉았고 방금 전까지 보았던 흐린 구름 대신, 넓고 파아란 하늘을 보게 된 것이다. 하늘이 정말 파랗고 예뻐서 나는 오늘 아침 나의 착한(!) 선택을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10여 년 만에 제주공항을 지나왔는데, 많이 변해 있어서 좀 헤매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