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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진 Sep 27. 2024

최고의 맛집(Best Meal of m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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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날, 오전수업을 마치고서 선배네 집에 갈 생각이었다. 직장 선배였던 H는 이제 거의 이십년지기 친구(!)같은 분이다. 주중에는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선배가 나때문에 오전에 잠을 깰까 미안해서 점심시간쯤 연락해 보고 근처에서 중국음식이나 시켜 먹자고 할 요량이었다. 이번 학기 출강하는 학교 중 하나가 선배집이랑 가까워서 방학에 시간표를 미리 알려드리고 ‘학기 중에 뵈어요. ’. 해 둔 상태였다.


  지난 봄 학기에는 월, 수요일에 갔었고 이번 학기에는 시간표가 바뀌어 화, 목요일에 출강한다. 수업과 수업 사이 잠깐 쉬는 시간을 어찌 알았는지 선배가 먼저 연락을 해 버렸다. 나때문에 그날 일정이 꼬여버린 사정이 있었는데, 내 탓도 하지 않고 점심때 집으로 오라 하신다.

  새벽녁에야 잠이 들었다던 선배는 어느 새, 10첩 반상을 준비 중이셨다! 보통 수업과 수업 사이에는 간식도 잘 안 먹고, 캠퍼스에서도 벗어나지 않는 편이라 라면에 김치반찬이어도 나는 좋았을 것이었다. 선배에게 이런 따뜻한 밥상 한 번 차려 드린 일이 없는데…. 반쯤 준비된 식탁을 마주한 순간 마음이 컥 했다.

  

  한번에 서너개의 화구를 장악하고 한편에선 뚝딱뚝딱 반찬들을 해 내는 선배 옆에서 나는 왔다갔다하며 재잘거리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감동했다. 지난 주 명절을 보내고 남은 음식도 있고 하니 별 것 아니라고 말씀은 하셨지만, 밥도 찌개도, 그리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계란찜도 '금방 된다'며 하나씩 하나씩 척척. 오이껍질을 쓱쓱 벗기는가 싶더니 어느 새 반찬 하나가 뚝딱. 나는 식탁과 주방 사이를 오가며 접시만 날랐다.


  도란도란 점심을 먹으며 생각해 본다. 그러고보니 이십대의 몇 해 동안, 선배의 따뜻한 목소리를 들으며 성장했구나. 아나운서를 꿈꿨던 그녀는 종종 주고받은 이메일에 늘 예쁘게, 특유의 부드러운 '언니 감성'을 넣어 보내셨더랬다. 소소한 사무실 일상이며, 창가의 화분 이야기며…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지 않았으면서 신기하게도, 선배는 그때도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가까이 지내는 동료이다.

  밥상 사진 몰래찍느라 대충 눌렀는데 앵글 안에 담겨 다행이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이런 따뜻한 밥상 한 번 차린 적이 있었나, 또 누가 나에게 이런 정성스런 집밥을 해 줄까. 사실은, 전기밥솥 아니면 밥도 제대로 못하는 나다.


  친구들의 소소한 안부를 주고 받으며 배부르게 먹고, 뜨끈한 숭늉에, 갓 내린 신선한 차에 과일까지 대접받았다. 한참이나 인생 선배에게, 가만히 앉아 밥상 받아먹고 있는 이 철없고 버릇없는 후배를 어찌할까...


 김이 모락나는 찌개와 찜을 앞에 두고 나는 생각했다. 아, 오늘 이건 내 인생 몇 안되는 최고의 집밥이야.


  그나저나, 반찬 속 재료들이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리얼한 사진을 찍어둔 걸 안다면, 선배는 분명 잔소리 한마디 할 것이다. 무심한 듯, 뚝뚝뚝 만들어 내신 저 반찬들이 유명 식당음식 못지 않았다는 것을, 아니, 그보다 더 맛있었다는 걸 선배는 모르는 것 같다. 선배가 말없이 보여준 그동안의 사랑과 우정에 감동해, 거짓말 조금 보태어, 나는 눈앞이 흐려지는 듯 했다.


  선배의 엄청난 요리 실력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풍성했던 저 시간에 대하여, 내가 사랑하는 멋진 선배여, 영원히 몰라라, 영원히 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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