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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Nov 05. 2022

나에겐 두 명의 엄마가 있다

태양같은 두 존재


최근 오랜만에 유튜브에 떠다니는 김미경 강사님의 강의를 들었다. '자존감은 홈메이드'란 주제로 40분 남짓한 강의를 하셨다. 책을 꾸준히 읽기 시작하면서 어린 시절 형성된 자존감이 내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에 강의 주제에 흥미가 갔다. 강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우리는 가족이 너무너무 중요한지 압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처를 가족에게 받습니다. 자존감은 홈메이드입니다. 절대 집 밖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부모의 잘못된 말과 행동이 아이의 자존감을 떨어뜨립니다. 자존감이 낮은 부모는 자식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남깁니다. 많은 부모들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데요. 중요한 건 상처는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과해야 없어집니다. 잘못했다고 반드시 사과해야 해요.



감동적인 이야기 속에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는데 다음 부분에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부모 중에 그러실 거예요. "사과 안 하면 안 되나요?" 
네. 그러면 안 돼요. 그런 애들은 결혼을 잘해야 해요. 만약 부모가 되게 무시하고 키웠는데 시집가서 시어머니가 "얘~ 넌 글을 진짜 잘 쓰는구나.", "어머 너 솜씨 진짜 좋다"라고 말을 해 주면 시어머니로부터 자존감이 탄생하는 애도 있어요.
아주 극히 드물죠......
(청중의 웃음)


약 30초 동안 이어진 이 멘트를 나는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른다. 10번쯤 돌려봤을 때 확신이 들었다. 내가 이런 케이스구나. 내가 바로 '극히 드문' 사람 중 한 사람이구나.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시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난 너를 믿는다' (내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엄마는 말이야~(우리 시어머니는 본인에 대해 말할 때 친자식에게 하듯 엄마라고 부르신다)

'어머 넌 솜씨가 좋다! (내가 가방을 직접 만들어 드렸을 때)

'음식 다 맛있다(우리 집에서 음식 대접을 해드렸을 때)

'엄마가 너 출근하는데 지장 없도록 그전에 일찍 갈게. 넌 걱정 말고 출근 준비하고 있어.'

(출근을 앞두고 갑자기 아이가 아파 어머니께 SOS를 쳤을 때)


난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어릴 때 홈메이드로 만들지 못했던 자존감이 어머니로부터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었던 거다. 결혼 전에 그렇게 초라하기 그지없던 내가 나 자신이 좋아하기 시작했고 '나도 가족으로부터 쓸모 있는 인간이 될 수 있구나'를 느끼고 가족이 상처를 주는 대신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결혼한 후다. 정확히는 시어머니를 만나고부터다. 하지만 그동안 내 안에는 알량한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그런 시어머니는 세상에 없어. 시어머니는 어디까지나 시어머니야',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일 거야. 진심이 아닐거야'

라며 어머니의 진심을 부정했다. 


어제 내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남편에게 시부모님이 갑자기 방문하신다는 연락이 온 거다. 밤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시부모님은 양손 가득 보따리를 들고 오셨다. 고구마와 감 그리고 금방 담근 알타리김치였다. 사실 집에는 이미 동네 엄마들이 나눠 준 감과 고구마가 넘쳐났기에 감사한 마음보다 '이걸 다 어떻게 처리하지?'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커피를 한 잔씩 뽑아드리고 어머니께서 갑자기 하실 말씀이 있다며 나를 방으로 부르셨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 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지? 내가 뭐 잘못했나? 그동안 너무 연락을 안 드려서 연락 좀 하라고 한 소리 하시려나 보나? 난 이제 죽었다ㅠ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으니 조용한 정적 속에 어머니와 나 둘만 있었다. 정적을 먼저 깬 건 어머니였다.


"내가 너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이 말을 해야 내 마음의 짐이 좀 덜 수 있을 것 같아."

"...... 무슨 말씀이요?......"

"네가 베트남에서 돌아와 우리 처음 만난 날 '어머니~'하고 나에게 안기며 눈물을 흘리는데 솔직히 마음속으로 '얘가 왜 이러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당황했나 봐. 먼 타국에서 고생했다고 너를 꼭 안아줬어야 하는데 내가 그러지 못했어. 그래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작년 이맘때쯤 나는 약 2년 반의 베트남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그때 어머니를 오랜만에 뵌 그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어머니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2년 동안 한 번도 뵙지 못했고 연락도 자주 못 드렸던 죄송함이 그리고 건강히 잘 계셨다는 감사함이 뒤섞여 내 속에서 솟구쳐 눈물로 새어 나왔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 마음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며느리가 아닌 자식이었다면 더욱 따뜻하게 안아주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거에 대한 미안함을 일 년 동안 간직하고 계셨던 거다.


일 년 전에 제대로 하지 못했던 포옹을 어머니는 그 방에서 두 배로 해주셨다. 그러면서 우리 둘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우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닌 엄마와 딸이었다. 그리고 느꼈다. 이게 바로 엄마의 포옹이구나. 이게 바로 아이의 자존감을 성장시키는 '미안하다' 한 마디구나. 항상 '네가 이해해라'라는 말을 듣고 자란 나는 부모로부터 듣는 '미안하다'라는 말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충분히 알고 있다. 어머니가 자식도 아닌 며느리에게 '미안하다'라는 한 마디 꺼내기까지 얼마나 고심하셨을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셨을지,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를. 어머니는 그야말로 높은 자존감을 밑받침으로 자식들의 자존감을 올려주는 그런 분이셨다. 엄마가 자식에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홈메이드 자존감을 나는 그때 또 한 번 경험했다. 


나에겐 두 분의 엄마가 계시다. 한 분은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시고 키워주시고 이런저런 대화를 허심탄회하게 할 수 있는 엄마. 그리고 약 10년 전 나를 딸로 받아주어 그동안 부족하다 느꼈던 사랑을, 바닥이던 자존감을 채워주시는 엄마가. 두 엄마가 나를 태양처럼 비추고 있다.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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