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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Jun 22. 2022

결혼식은 눈물 버튼

결혼식에서 왜 나는 눈물이 나는지


남편을 통해 옛 직장 동료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000 결혼한대."

"정말?"


그녀는 무려 20년 전에 알게 된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다. 내가 퇴사한 후로 거의 15년 동안 우린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남편이랑 같은 부서에서 일했다는 인연의 끈으로 간간이 그녀의 소식은 듣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 동생이 부서 회식 중 남편을 통해 "언니랑 통화하고 싶어"라며 목소리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언니~~ 너무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00아~~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00 님(내 남편)을 통해서 종종 소식 듣고 있었어요. 언니 보고 싶어요."

"그래 나도 보고 싶다. 우리 조만간 보자."


거의 10년 만에 듣는 목소리다. 그동안의 세월이 무색하게 그녀는 여전히 20대 때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반가움을 표현했다. 목소리엔 정이 넘쳤고 한껏 들떠 있었다(아마도 알코올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목소리를 들으니 그 시절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임원 비서 업무를 했던지라 항상 깔끔한 단발머리에 정장 차림, 싹싹한 말투, 동생이란 생각이 안 들 정도로 일찍 철이 들어버린 모습, 적당한 술도 곁들일 줄 아는 모습까지. 그야말로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 성격 밝은 아가씨였다.


그 후로 거의 5년 만에 그녀의 결혼 소식이 들려온 거다. '조만간 만나자'라는 우리의 말은 어느새 허공으로 날아가고 세월의 무심한 만이 남아 있었다. 내가 그녀의 결혼 소식에 놀란 이유는 궁금했던 인연을 드디어 만났다는 기쁨 반과 그리고 거의 입사 20년 만에 사내 커플로 결혼에 골인했다는 신기함 반이 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서로를 오랜 기간 동안 지켜보다가 부부의 연을 맺기로 했을 때는 서로의 겉모습이 아닌 진짜 사람됨을 보고 선택했으리라 생각됐다. 요즘은 '결혼 적령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결혼 시기가 늦어지고 있지만 그 결혼 적령기도 단순히 신체적 나이에 맞춰진 즉 임신 가능성이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진 거란 생각이 든다. 오히려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중대한 이벤트는 정신적 성숙과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을 줄 아는 아량이 있을 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기에 마흔을 넘긴 후에 하는 새 출발은 뭔가 진중함과 성숙한 멋이 깃들어 있다. 40대의 결혼이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다. 새로운 출발선 앞에선 그들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일까?, 아님 많이 변했을까?'


아무리 상상해 보려 해도 20대 때의 풋풋했던 모습과 '언니~언니~'하며 나를 따랐던 지극히 동생다운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게 바로 어릴 적에 만났던 인연과 나이가 들어서 만난 인연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에 만들어진 인연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우릴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조금 실수해도, 완벽하지 않아도 용서가 되고 풋풋함이 서려있는, 세상 물정 몰라도 마냥 행복했던 20대 시절로 말이다. 어느새 우린 20년이란 세월의 다리를 건너 누구도 의심할 여지없는 40대가 '어른'이 되어버렸다(마음의 나이는 항상 신체의 나이를 못 따라가지만). 진짜 어른이 되었기에 '나'자신뿐 아니라 직장인으로서, 부모, 딸, 며느리로서 온갖 책임감에 짓눌리는 요즘 나를 보니 단지 그 친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작은 해방감을 맛보는 듯했다.


결혼 장소는 '남원'이다. 예전에 동생의 고향이 남원이라고 흘려들은 기억도 생각난다. 네이버에 검색하니 '전라북도 남원시'라고 떴다. 어딘고 하고 위치를 찾아보니 지명으론 전라북도지만 거의 전라남도에 가까운 전라북도였다. 주말에 차 막힐 걸 생각하면 족히 4시간을 잡고 가도 결혼 시간에 빠듯할 듯했다. 순간 동생이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서울에서 외로운 타향살이를 했다는 생각에 대견함과 동시에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남원과 서울의 거리가 이 정도였다니. 네비에 찍힌 그 벌어진 거리를 보고서야 그녀의 외로움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우리 가족은 남원 결혼식장에 들렸다가 전주 한옥마을로 가서 1박을 하고 오는 여행 일정을 짰다. '진짜 나 빼고 다 놀러 다닌다'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고속도로에는 아침부터 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휴게소서도 마스크를 벗고 너도나도 간식거리를 즐기는 모습이 코로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단지 사악한 가격만 빼고 말이다. 동네에서는 절대 사지 않을 가격의 먹거리에 무심히 주문을 넣는 내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옥수수 하나에 3천 원, 버터구이 오징어 한 팩(한 주먹도 안 되는 양)에 5천 원, 어묵 한 개에 4천 원. 오래전에 헤어진 동생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이 가격표를 안드로메다로 애써 날려버렸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니 드디어 남원이란 이정표가 보였다. 남원 중에서도 가장 시내라는 곳에 예식장이 있었다. 십여 분을 더 달리니 고즈넉한 분위기의 한옥 건물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맞다! 이곳은 '춘양'으로 유명한 도시였지? 마침 결혼식도 한옥 야외마당에서 치러진다니, 실내 예식장에서 공장에서 찍어내 듯 결혼하는 모습만 보다 처마 밑에서 자연과 어우러질 예식의 모습을 생각하니 더욱 기대가 되었다. 조졸하게 꾸며진 야외 예식장은 간소하면서도 정갈했다. 양가 친척 어른, 친한 지인 몇 명이 모인 소규모 예식은 오히려 복잡하지 않고 파란 하늘과 녹음이 어우러진 풍경에 신랑, 신부를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야외 예식이라 신부 대기실이 없는 관계로 한쪽 의자에 앉아있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동생 000이 보였다. 식이 곧 시작되기 직전이어서 나는 멀리서 손짓을 하며 부랴부랴 신부를 향해 걸어갔다. 동생은 내가 누구인지 한참을 쳐다보더니 내가 '나 OO 언니야'라는 소리에 '어머~~ 언니!'라고 부르며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왔냐며 놀라워했다. 너무 멀어서 와줄 거란 생각을 당연히 못 한 모양이다. 정확히 15년 만이다. 그것도 자주 보던 사내 건물이 아닌 남원에서. 깔끔한 정장이 아닌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고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지만 대번에 그 아이만의 고유한 느낌이 살아 꿈틀거렸다. 사람에게는 나이가 먹어도 변하지 않은 그 무엇, 즉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나 분위기, 뉘앙스들이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 동생에게 나만의 느낌으로 다가갔으리라. 서랍장에 고이 모셔둔 서로가 간직한 느낌을 바로 이날 우리는 활짝 열어 보았다. 나의 20대 시절의 일부인 짧은 회사 시절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우리 둘은 잠시나마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짧은 대화를 나누고 곧이어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주례 없는 결혼식으로 진행됐으며 신랑, 신부는 동시에 입장했다. 곧이어 배우자가 된 각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은 편지를 낭독하는 시간이다. '그들은 그 편지를 준비하면서 오글거렸을까, 민망했을까.' 나 혼자 결혼 10년 차 다운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나는 절대 가질 수 없는 막 출발하는 신혼부부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서로의 풋풋한 마음이 한 자 한 자에 드러났다. 청승맞게도 나도 모르게 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왜일까? 그들도 10년이 되어 다시 되돌아보면 이불 킥 날릴 일에 왜 나는 또 눈물이 나는 지. 꼭 결혼식장에 오면 꼭 내 딸을 시집보내는 (이 일은 상상만으로 눈물 날 것 같다) 부모의 입장에서 또 새 출발하는 신부의 입장에 나 혼자 빙의되어 자동적으로 눈물이 흐르곤 한다. 


이날의 절정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결혼하는 동생의 친동생이 언니와 형부에게 편지를 낭독하는 시간이었다. 그 동생은 몇 년 전에 결혼을 했는지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딸 둘을 데리고 마이크 앞에 섰다. 친동생은 편지를 읽다가 목이 메어와 읽다 말다를 반복했다. 울먹이는 소리가 내 심장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신부도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내가 동생 입장이라도 눈물 났을 거야.'


하고 생각했다. 그 친동생의 입장이 되니 더 울컥한 눈물이 흘렀다. 친동생의 편지를 들어보니 막연하게 동생으로 생각했던 그녀에게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홀어머니를 지키는 맏딸이자, 한 집안의 가장이며, 타지에서 가족을 생각하며 직장 생활하는 큰 언니의 모습이. 그녀는 집에서 막내로 자란 나보다 더 일찍 큰 어른으로 성장해 있었다.


내가 결혼식장에서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그 의미를 찾으려니 이전보다 더 복잡해진 기분이다. 이 전에는 부모님을 생각하는 딸의 마음이 8할을 차지했다면 이제는 부모 입장에서 다 키운 딸자식의 새로운 출발을 바라보는 애틋함도 적지 않게 뒤섞여 있다. 나도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아는 걸까. 나이가 들수록 그 의미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에겐 결혼식은 희망찬 출발인 동시에 눈물 버튼임엔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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