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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미루면 미룰수록 복잡해지는 이유

업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by 철학하는 CEO

전시회 출장 후의 현실

지난주 해외 전시회 참가를 위해 일주일간 출장을 다녀왔다. 전시회장에서는 쉴 새 없이 바이어들과 상담하고, 새로운 파트너십 기회를 모색하느라 바빴다. 전시회가 끝난 후에도 현지에서 추가 미팅과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메일함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 급한 건만 처리하고, 나머지는 한국 돌아가서 정리하지 뭐."


한국에 돌아와 메일함을 열어본 순간, 절망스러웠다. 출장 전 깔끔했던 메일함에는 무려 200통의 미확인 메일이 쌓여 있었다. 직원들의 메일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피드백을 줘야 했고, 단순한 문의 메일들은 재촉 메일로 변해 있었고, 새로운 관련자들이 참조에 추가되면서 복잡한 메일 체인이 만들어져 있었다. 간단한 답변만 줬으면 끝났을 일인데, 답변 지연으로 인해 고객 불만 직전까지 바뀐 것도 있었다.


이런 경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회의록 정리를 미뤘다가 참석자들의 기억이 모호해져서 다시 확인해야 하는 상황, 고객 문의를 방치했다가 단순한 질문이 클레임으로 번진 경우, 보고서 작성을 미뤘다가 데이터가 업데이트되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일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는데, 왜 오히려 더 복잡하고 어려워졌을까? 그 답을 물리학에서 찾을 수 있다.


업무도 자연법칙을 따른다

몇 년 전, 엔트로피 법칙에 대해 알게 되면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물리학의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고립된 시스템에서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한다. 엔트로피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무질서', '어질러짐', '복잡함'이다.


우리가 아무런 에너지를 투입하지 않고 방치하면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어질러진다. 방을 일주일간 그냥 두면 저절로 어질러지고, 뜨거운 음식을 놔두면 자연스럽게 식는다. 이게 바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반대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려면?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방을 청소하고, 옷을 정리하고, 음식을 다시 데워야 한다. 우리가 '정리정돈'이라고 부르는 모든 행위는 사실 엔트로피와의 싸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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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전에 쓴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https://brunch.co.kr/@idh1008/46


그런데 문득, 복잡해진 내 이메일함을 보며, 이 물리법칙이 업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업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방치된 업무는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도가 증가한다.


업무 엔트로피는 어떻게 증가하는가

1. 시간의 흐름과 상황 변화

월요일에 받은 프로젝트 피드백을 금요일에 처리하려고 하면, 이미 상황이 바뀌어 있다. 관련 데이터가 업데이트되었고, 다른 부서의 요구사항도 추가되었다. 클라이언트의 우선순위도 변했을 수 있다. 단순했던 수정 사항이 이제는 전면적인 재작업을 요구한다.


2. 기억의 감소와 맥락의 손실

"그때 그 회의에서 뭘 결정했더라?" 시간이 지날수록 초기 의도와 맥락이 희미해진다. 회의록을 바로 정리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참석자들에게 다시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기억도 이미 흐려져 있다. 결국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3. 관련자의 기하급수적 증가

답장이 늦어진 메일에는 상사가 참조로 추가되고, 관련 부서 담당자들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단순한 1:1 커뮤니케이션이 복잡한 다자간 협의로 변한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해야 하고, 각자의 일정을 맞춰야 한다.


4. 기대치의 상승과 완벽주의의 함정

시간이 지날수록 "이렇게 늦었으니 더 완벽하게 해야겠다"는 압박감이 생긴다. 원래 30분이면 충분했던 업무가 "이제는 몇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완벽하게"라는 부담으로 변한다. 결국 더욱 미루게 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일상 속 업무 엔트로피의 실체

이메일의 엔트로피

즉시 처리: 간단한 답변 요청 → 2분 내 답변 완료

1일 후: "확인 부탁드린다"는 재촉 메일 1통 추가

3일 후: 상사가 참조에 추가되며 "빠른 처리 부탁" 메시지

5일 후: "다른 업체와 비교 검토 중"이라는 압박성 메일

회의 후속 업무의 엔트로피

당일: 기억이 선명해 30분 만에 회의록 작성 가능

1일 후: 세부사항이 흐려져 참석자 1-2명에게 확인 필요

3일 후: 대부분 기억이 모호해 전체 참석자 재확인 필요

1주일 후: 새로운 이슈가 생겨 회의 내용 자체가 무의미해짐

고객 문의의 엔트로피

즉시: 단순 질문 → 친절한 답변으로 만족

1일 후: 약간의 불편함 표현 → 사과와 함께 답변

2일 후: 정식 불만 제기 → 담당자 에스컬레이션

4일 후: 팀장 또는 경영진에게 불만 전달


엔트로피 감소를 위한 실전 전략

1. 2분 룰의 적용

데이비드 앨런의 'Getting Things Done'에서 제시한 원칙이다. 2분 내에 처리 가능한 일은 즉시 처리한다. 나중에 다시 검토하고 처리하는 데 드는 시간보다 지금 당장 처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2. 24시간 응답 원칙

모든 업무에 완벽한 답변을 할 수는 없지만, 24시간 내에는 1차 응답을 한다. "확인했습니다. 정확한 답변은 O일까지 드리겠습니다"라는 간단한 메시지만으로도 엔트로피 증가를 막을 수 있다.

3. 완벽주의 버리기

80% 완성도로 빠르게 진행하는 것이 100% 완성도로 늦게 하는 것보다 낫다. 'Done is better than perfect'라는 말에는 과학적 근거가 있다. 완벽을 추구하느라 미루는 순간, 업무 엔트로피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4. 업무 일지의 힘

나중에 기억하지 못할 것들을 미리 기록해 둔다. 회의의 핵심 내용, 결정사항, 다음 액션 아이템 등을 간단하게라도 메모해 둔다. 이는 미래의 나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절약해 주는 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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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투입의 경제학

물리학에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이다. 업무도 마찬가지다. 초기에 투입하는 5분의 에너지가 나중에 투입해야 할 5시간의 에너지를 절약해 준다.

출장에서 돌아온 후 120통의 메일을 처리하는 데 하루 종일 걸렸다. 만약 출장 중에 하루 30분씩만 투자해서 중요한 메일들에 간단한 답변이라도 했다면, 돌아온 후 1-2시간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초기 에너지 투입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일상의 엔트로피와의 투쟁

결국 우리의 일상은 엔트로피와의 지속적인 투쟁이다. 방을 정리하고,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모든 행위는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활동이다. 이를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무너진다. 하지만 이제는 왜 그런지 안다. 이는 우리의 의지력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법칙이다. 중요한 것은 이 법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이다.


업무를 미루고 싶은 유혹이 들 때마다 이것을 기억하자. "지금 투입하지 않은 에너지는 나중에 배로 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업무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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