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새벽 6시 각자의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암흑처럼 깜깜한 길을 나서는 발걸음을 그의 조그만 손전등이 환하게 비춰주면 반짝이던 샛별도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곤 했다. “잘 잤어요?” 그가 묻는다. 이제 그와 함께 걸은 지 닷새가 지났는데, 영어로 건네는 그의 말이 모두 한국어처럼 들리기 시작해 불편함이 없어지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어둠이 서서히 걷히면서 우리의 등 뒤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나와 그의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가까이 서서 걷고 있었다.
한국에서 잘 알고 지내던 스페인 출신 선교사 신부님이 본국으로 휴가를 떠나기 전 당신의 친구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했다며 나에게도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하셨다. 나는 일행과 함께 2주간 언어 사용의 어려움 없이 걷다가 이후에는 혼자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 도착해서 하루의 일정을 끝내야 하는 날이 있었다. 그 동네는 작은 호스텔 한 개와 거기에 붙어있는 식당이 전부인 정말 작은 마을이었다. 많은 수의 순례자에 비해 턱없이 작은 규모의 식당에서 찾은 최선의 방법은 길게 식탁을 붙여 두고 식당에 도착한 순서대로 앉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한국인 3명과 아일랜드인 1명이 함께 앉았는데, 모두 일행 없이 걷고 있으니 다음 날 함께 걷자는 말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 아침,우리는 자연스럽게 두 명씩 짝을 바꿔가며 함께 걷고 있었다. 아일랜드 사람, 제임스가 내 곁에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보수적인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것과 가족의 투병 생활을 지켜보던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대를 쌓기 시작했다.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다. 함께 길을 걷던 한국인 A가 내게 제임스가 참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숨긴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했던 2시간의 말미에 너무나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생긴 참이었다. 바로 그때, A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제임스에게 물었다. “Are you single?". 그는 아무 것도 없는 왼손을 펴 보여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 그 말을 듣고 난 이후, 나는 그에게 궁금한 것이 더 많아졌다. '빨리빨리' 순례길을 끝내고 싶어 하던 동행하던 한국인들은 모두들 먼저 떠나버리고 결국 나와 제임스가 남게 되었다. 온전히 둘만 걷던 그 길이 좋았던 다음 날 아침, 나를 위해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산티아고까지 우리 함께 걸어가요.” 그가 대답했다. “OK."
그날 이후 20일 동안 우리는 길동무가 되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짧은 시간 안에 나는 그가 좋아졌고, 그도 나에게 반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도착한 숙소에서 아빠가 아일랜드 사람이고 엄마가 부산 사람인 20대 청년을 우연히 만나 유쾌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또 중학교 진학을 앞둔 아이를 데리고 길을 걷는 가족들과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길을 걷고 또 걸은 끝에 드디어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했다. 성당의 미사 중에 커다란 향이 쳐지며 순례객들을 축복해 주는 의식이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기도했다. 800km를 걸어왔던 33일 동안 몇 개의 물집 말고는 어떤 부상도 없이 잘 도착한 것이 정말 감사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 시간 동안 친절하게 나와 동행해 준 제임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 순간 만약 제임스와 내가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지내다 훗날 순례길에서 만났던 그 청년과 같이 부산사람 엄마와 아일랜드 사람 아빠를 가진 아이의 부모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엉뚱한 상상까지 하는 내 모습이 좀 놀랍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의 만남을 한 여름밤의 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했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각자의 나라에 돌아간 뒤에도 계속해서 연락을 이어갔고, 결국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제임스는 나를 만나러 한국을 찾아왔다. 다시 함께 하게 된 우리는, 누가 먼저라도 할 것 없이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결혼’이라고 믿게 되었다.
어쩌면 인생의 중대한 변화는 때때로 한 순간의 결심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내가 ‘결혼’을 그것도 ‘국제결혼’을 해서 한국을 떠나겠다는 결정을 한 것은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중대한 선택이었지만 나는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생을 흔히 길에 비교하는데 우리가 함께 걸었던 그 길에서 인생의 진정한 동반자를 만났다는 마법과 같은 순간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제임스와 내가 함께 한지 10년이 된 올해. 우리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둘이 함께 걸었던 그 길을 우리의 아이 데니스 대건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모두 함께 걷기로 했다. 우리 두 사람이 걸었던 800km의 장정은 아니겠지만, 그날이 되면 우리가 그랬었던 것처럼 아이와 함께 하루 종일 걷고 또 이야기 나누며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