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바닷가 옆 작은 학교에 다닌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차를 타고 등교하지만 운전을 할 줄 모르는 엄마를 둔 아이는 아빠가 쉬는 날이 아니고는 뚜벅뚜벅 엄마와 함께 학교까지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동네에서 꽤나 큰 건물에 드는 4층짜리 신용금고를 지나, 비바람을 이겨내도록 어부들이 고깃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 둔 계류(繫留) 장을 지나면, 지난밤 비둘기와 갈매기 떼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은 모비딕의 에이합(Ahab) 선장 동상을 만난다. 이제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실 때쯤 길머리를 오른쪽으로 돌아 1미터가 조금 넘는 건널목을 총총 건너면, 아침부터 세차 중인 소방서를 지난다. 이내 (관광객들은 잘 모르지만) ‘개들이 아침마다 볼 일 보는 곳’이라서 동네 사람들끼리 이름을 붙인 ‘dog beach’에 도착한다.
그 어떤 계절보다 이른 봄날에 그 해변을 지나게 되면 나와 아이의 가슴은 소방서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벚꽃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우리는 그 길에 서서 고개를 들고, 나무에 새순이 돋아나지 않았을까 살펴보고 또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영화처럼 떨어지는데 보름도 걸리지 않지만, 그 꽃을 기다리는 수개월의 시간 동안 나와 아이의 마음속에선 진작부터 새순이 돋고 꽃이 만개하고 있었기에 진짜 벚꽃이 피고 그렇게 금방 져 버려도 다행히 아쉬운 마음이 덜하곤 했다.
되돌아보면 한국에서 살 때엔, 봄날에 벚꽃이 피고 날리면 기어이 벚꽃놀이를 가서 온갖 탄성으로 벚꽃을 칭송하고 사진을 찍어 올리고 야단법석을 떨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찬란했던 벚꽃이 지고 떨어지면, 벚꽃 나무에 냉정하리만큼 무관심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 살면서 아이를 통해 나무를 좀 더 살펴보는 애정이 생겼고, 벚꽃나무의 낙화가 또 다른 흐드러짐의 시작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흰색이든 분홍색이든 벚꽃이 지고 나면 그 나무는 꽃이 피고 졌던 그 나뭇가지, 그 자리에 연녹색 빛깔의 나뭇잎을 무성하게 피어낸다. 왜 그런지 아침의 햇살은 유난히 바닷가에서 더 반짝이는 것 같고, 사물들을 더욱 선명하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 햇살이 비추는 해변의 나뭇잎들은 더 푸르고, 더 무성하고, 더 가득해 보이는 것 같다.
어느 날, 아이는 나뭇잎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했다. 나는 아이를 힘껏 들어 올려 나뭇잎을 만져도 보면서 관찰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아이는 벚꽃 나뭇잎의 테두리가 어떤 것은 매끈하고 또 어떤 것은 톱니처럼 거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 아이는 식사를 하며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아빠에게 진지하게 설명했고, 남편은 그 이야기를 흥미로워하면서 식사 후에 벚나무 길로 산책을 가자는 제안을 했다. 우리는 그 길에 도착을 해서 나뭇잎을 사진으로 찍으면 나무의 이름을 알려주는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두 개의 다른 벚나무 이름을 드디어 찾아냈는데, 그 순간 반짝이는 아이의 눈빛은 '유레카'를 외치고 있었다.
다음 날이 지나고 또 그다음 날이 지나고, 무성했던 벚나무 잎들도 지고, 단풍나무 몇 그루에서 노랗고 붉은 잎이 달리는 가을을 지나 또 매일 내리는 비에 속절없이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겨울이 찾아오면, 사각사각 건조한 낙엽 위를 걷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아이에게 설명하며 학교에 다다른다. 저 멀리 교문이 보이기 시작하는 좁다란 길을 따라 느리게 움직이는 차들의 엔진 소리와 그 속에서도 들리는 아이의 타닥타닥 발소리와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쏴아’ 하는 소리의 향연이 멈출 때쯤 아이도 나도 발걸음을 멈추고, 서로에게 포옹을 해 준다. “엄마, 잘 다녀올게. 이따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