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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꾸 Jul 02. 2022

잡동사니

 종종 상당히 불편한 사람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 마저도 사랑하려고 애썼으나, 아무리 곱씹어 봐도 단물 하나 나오지 않는 탓에, 도저히 사랑할 맛이 나지 않았다. 단물은 그렇다 치고, 약간의 씹는 즐거움이라도 있었다면, 조금이나마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런 사람을 상한 사람, 줄여서 '상사'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렇다고 직장상사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조금 어른스럽다는 느낌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상사를 씹어대면, 되려 너무 그의 단편적인 모습만 생각하지 말라는 어른스러운 답변이 돌아온다. 이런 답변을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가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다. 잔뜩 꼬여있는 세상의 매듭을 웃으면서 천천히 풀어나가는 사람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는 불만, 야망, 기회 같은 것들을 잔뜩 품은 채 겉으로는 깨어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꼬여 있는 매듭을 웃으면서 풀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아니면 어른스러움이 런 것이 혹시 그런 것일까.


 원래 어떤 사람이든 처음에는 단면밖에 볼 수 없다. 단면 이상의 측면, 후면 같은 것들을 보기 위해서는 나는 그 사람을 더 많이 관찰해야 하니까. 아마 그 사람이 단면이 사각형이라고 했을 때, 여러 면이 있다면 최소 정육면체일 것이다. 내 노력으로 그 6개의 면중 내 입맛에 달달한 한쪽면을 찾아야 할까? 게다가 그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상한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구역질 나는 맛을 참아야 한다는 얘기다. 나는 귀찮음이 가득한 사람이라 처음 만난 사람의 여러 면까지 볼 체력도, 생각도, 참을성도 없다. 

 

 오랜만에 비가 대차게 쏟아지는 날, 집구석에 처박혀있는 먼지가 수북한 부메랑을 보았다.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잡동사니였다. 나는 그 지저분한 부메랑을 든 채로 집 앞 현관으로 앞에서 힘차게 던졌다. 다시 부메랑이 돌아왔을 땐, 소복이 쌓였던 먼지와 더러운 것들이 비에 씻겨 깨끗했지만, 부메랑은 집구석 어딘가에서 다시 잡동사니로 잊혀갔다.


 잡동사니는 굳이 그 의미를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잡동사니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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