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어 오늘도
첫째를 키울 때에는 비장했다. 내 인생에 아이는 이 아이 하나뿐이라고 그러니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모유 수유를 했고, 새 옷을 입히고, 아이에게 필요해 보이는 육아용품을 사들였다. 아이를 위해 산다고 하는 물건들은 사실 아이에게 필요하다기보다 양육자인 엄마에게 더 유용한 것들이었다. 아이가 놀잇감을 물고 빨고 탐색하는 동안 나의 손과 발이 쉴 수 있었다. '이래서 육아는 장비빨이라고 하는구나.' 돈을 들이는 만큼 자유시간이 늘어났고 쏘서, 점퍼루, 국민문짝들이 집을 채우는 만큼 공간은 줄어들었다.
아이가 기어 다닐 즈음에는 거실에 대형 매트 3개를 깔았다. 주방 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벽매트로 울타리를 쳐서 거실을 놀이 공간으로 만들었다. 매트 가격만 100만 원이 훌쩍 넘었지만 아깝지 않았고, 거실이 사라졌지만 아쉽지 않았다. 전집도 들였다. 책장이 없을 때라 박스째 바닥에 두었지만 놓여있는 책만 봐도 뿌듯했다. 엄마라면, 부모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고 우쭐댔던 것도 같다. 고백하건대, 아이는 배제된 반쪽짜리 자기만족이었다. 어린 시절 결핍에 대한 보상심리였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물만 주면 자라는 콩나물처럼 쑥쑥 자랐고 들였던 물건들은 소명을 다할 때마다 지인의 집으로, 당근마켓으로 옮겨갔다. 때때로 버려지기도 했다. 아이의 성장에 맞추어 로보트나 레고처럼 조작을 필요로 하는, 비교적 부피가 작은새로운 장난감들이 비워지는 공간들을 다시 채웠다.
거실이 거실다워진 건 아이가 여섯 살이 될 즈음이었다. 거실에는 놀이 매트 대신 취향을 반영할 수 있는 러그가 깔렸고 방문마다 붙여놓았던 학습 벽보들도 없어졌다. 북유럽 스타일까지는 아니지만 한층 간결해진 집은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아이가 사는 집으로 보이지 않았다. 코로나라는 암흑의 구간도 있었지만 마침내 육아의 출구에 다가섰고 밝은 햇살은 눈부셨다. 이제 책을 읽을 시간도 글을 쓸 시간도 많아졌고, 아이와 여행도 편히 다닐 수 있겠구나! 감격의 시간은 짧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육아의 터널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둘째의 육아는 시작부터 달랐다. 우선 모유 수유를 하지 않기로 했다. 무얼 사려고 하지도 않았다. 돌이 지난 둘째가 있는 지인이 아기 옷이며 놀잇감이며 육아에 필요한 것들을 물려주었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부족한 건 새로 사 거나 당근마켓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되도록 사지 않는 편을 택하고 있다. 매트는 최소화했고 울타리도 만들지 않았다. 덕분에 둘째는 식탁 아래, 옷방, 욕실 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보이는 사물들을 물고 뜯고 맛보느라 하루가 바쁘다. 호기심을 높이려고 놀잇감을 펼쳐놓기도 하고 감추었다가 다시 꺼내 놓기도 하는데 아기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살림에 참견하는 걸 더 재미있어하는 눈치다.
앉기가 서투르던 때에는 뒤로 넘어져 쿵, 소리도 몇 번 났다.(아니 왜 넘어질 땐 꼭 매트 밖 맨바닥이냐고...) 아기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대신(첫째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품에 안고 뒤통수를 어루만져주었더니 울음을 금방 멈춘다. 아프기보다는 놀라서 터진 울음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열심히 기어 다니라고 바닥만 깨끗하게 닦을 뿐 전선처럼 위험한 것만 아나면 웬만해선 그냥 둔다. 둘째는 발로 키운다더니 정말 그렇다.
첫째를 키울 때는 ‘퇴근’이 없었다. 거실은 언제나 놀이방이었고 아이가 젖을 찾으면 달려갔다. 부피가 큰 놀잇감들은 어디 치울 수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공간이, 내 몸이 24시간 육아모드였으므로 ‘육퇴’가 불가능했다. 둘째를 분유 수유를 하며 알게 된 최대 장점은 일과가 예측가능하다는 점이다. 분유와 이유식, 낮잠과 밤잠 시간이 거의 일정하다 보니 돌봄 사이에 산책이나 책 읽기를 끼워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기가 밤잠을 자기 시작하는 저녁 8-9시가 되면 육아로부터 ‘퇴근’이 가능해졌다. 몸이 퇴근했으니 이제 공간도 쉬게 할 타이밍. 널브러져 있던 장난감들을 치우고 천장 조명등을 소등한 뒤 스탠드 조명 하나만을 켠다. 하루 육아가 끝났다는 신호이다. 활기가 넘치던 거실이 차분해지면 비로소 나만의 공간이 되살아나고 안온한 시간이 찾아든다.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소파에 엉덩이를 대는 그 순간의 감촉이 곧 행복이다. 맥주 한 캔 손에 들려있다면 금상첨화.
첫째를 키워봤다고 둘째 육아가 만만해 지는 건 아니다. 익숙하다거나 노련해졌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첫째를 키우면서 겪었던 어려움들, 시행착오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은 건 분명하다. 내가 찾은 실마리는 ‘내려놓음’. 너무 잘하려고 애쓰거나 집안을 아기 용품으로 가득 채우는 대신 너무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모유 아니어도 괜찮아, 새 옷 아니어도 괜찮아, 장난감이 부족해도 괜찮아 했더니 육아가 정말 괜찮다. 이쯤되니 육아는 원래 힘들지 않은 거였는데 스스로 육아는 힘든 거라고 나 자신을 몰아세웠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육아에 지쳤다면 지금 두 손에 꼭 쥐고 있는 게 무엇인지 살펴보면 좋겠다. 내려놓을 수 있는 건 내려놓아도 괜찮다. 육퇴의 맛이 이렇게 달콤한 줄 알았더라면 더 일찍 내려놓았을 텐데 깨달음은 삶보다 늦다.